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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야문답 # 1 - 김예진

문예관 조회 수 1843 추천 수 0 2015.06.19 15:38:49



프롤로그

 


"도련님 저는 이제 지쳤습니다. 도련님이라도 어서 도망치십시오."

"낭자, 그럴 순 없소. 우리가 어떻게 온 길인데."

낭자는 아까 무사가 휘두른 칼에 등을 맞아 가까스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와 만나기 위해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다 죽고 그녀만 남았는데...

"낭자 일어나보시오. 조금 만 더 가면 나룻배가 있소, 그걸 타고 도망가면 되요. 힘을 내시오."

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낭자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녀를 안타까이 쳐다보았다.

"도련님, 소녀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하옵니다. 그만 가옵소서."

그리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안돼요. 낭자, 낭자!"

 

나는 절규하며 그녀를 흔들어 깨웠으나 한번 감은 그녀의 눈은 다시는 뜨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면 우리를 쫒아오던 무사가 저 만치 앞에 가증스럽게 웃으며 나를 보고 서 있다. 그의 팔은 지난날의 흔적인 듯 가위모양의 흉터가 군데군데 나 있고 손목은 아까 긁힌 상처로 피가 뚝뚝 흘러내려 험악한 인상이 더욱 강조되어보였다. 그와 나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나는 뒷걸음을 치며 이 자리를 피해보고자 하지만 사방 어디에도 빠져나갈 곳이 없다.

그는 차가운 웃음을 띠며 기세등등하게 내게 다가왔다.

이제 우리사이의 거리는 한 뼘도 되지 않는다.

'아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지.'

그가 나의 목을 베기 위해 칼을 치켜들자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때 멀리서 누가 나를 불렀다.

 

 


***

 


"은서야아~~! 은서야아아아, 글 나부랭이 그만 쓰고 밥 먹고 빨리 학교가! 넌 취업준비 안 해? 도대체 몇 번을 불러야 대답할거니, 몇 번째냐고? 엄마가 밥을 하면 뭐해, 자식은 방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고. 식으면 데우고 또 데우고. 엄마가 너 밥해주는 기계냐, 엉?"

 


부엌에서 엄마가 나를 향해 외쳤다. 그래도 내가 나오질 않자 밖에서 잔뜩 화를 머금은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린 방문 앞에서 멈추더니 정확히 0.3초 후 문이 확 열렸다. 나는 속으로 '조금만' 이라고 외치며 자판을 '다다다다' 두드렸다. 그때 컴퓨터 화면이 내 앞에서 사라지고 대신 엄마의 의기양양한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놀라 쳐다보자 엄마는 여봐란 듯이 노트북의 전원을 꾸욱 하고 껐다. '아씨 아직 저장 안했는데.'

 


내 이름은 김은서. 올해 23살의 지방대학생. 동창회에서 얼굴을 마주대고 봐도 전혀 기억이 안 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나다. 굳이 남들과 다른 점을 꼽으라면 역사를 좋아한다는 것. 그 중에서도 18세기 후반 영, 정조 시대에 빠졌는데 그 때로 돌아갈 때마다 내가 마치 중원을 누비는 박지원이 된 것 같고, 백탑파의 시인들과 우정을 주고받는 보헤미안이 된 것 같고, 인재들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임금의 비호를 받는 규장각 각신이 된 것도 같기 때문이다. 또래 친구들이 취업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싸구려 로맨스 소설을 써서 가끔 용돈 벌이를 하곤 했다. 당연히 나의 화젯거리란 구상하고 있는 소설 속 이야기. 그래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이런 나지만 졸업반이 되자 취업이 되어 학교에 나오지 않는 같은 과 친구들이 한두 명 씩 늘어나는 것을 보며 걱정이 되긴 했다.

 

쏘아붙이며 나를 바라보는 엄마를 뒤로하고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도서관에 도착하니 괜찮은 자리에는 죄다 사람들이 차지했다. 방학이지만 다들 공부하러 왔는지 도서관 열기가 대단하다. 대충 문 옆, 시험기간 동안에도 사람들이 앉지 않는 자리에 앉아 어제 산 토익 책을 펼쳐 들었다.

 


You have to wait _____ five months for the results.

(A) other

(B) the others

(C) another

(D) the other

 


문제를 살펴보는 나. '흠, 어쩌라는 거지?'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The document is ready to sign _____ four days.

(A) about

(B) in

(C) on

(D) during

 


문제를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머리위에 떠다녔다. 물음표. 오랜만에 머리를 너무 썼더니 잠이 오는 걸. 책은 덮어두고 다시 내가 쓰고 있던 소설의 이야기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드는 생각, '졸업하면 좋아하는 소설을 실컷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시간도 별로 없겠지? 그러고 보니 나 서울 구경 한 번 해 본적 없잖아? 파고다 공원에 있는 백탑도 봐야하고, 사도세자의 뒤주가 놓여 있었던 휘령전도 가야 하고, 무엇보다 화성에도 가야 하는데..."

졸업 후를 생각하니 슬퍼졌다. 며칠 후 나는 엄마에겐 방학맞이 특강을 듣는다고 말하고 한 달간의 궁궐 투어를 계획하고 서울로 향했다.

 


***

 


2005년 8월

 


야심찬 나의 계획과는 달리 도착한 당일 서울에는 거칠게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아침 무렵엔 이슬방울처럼 작은 빗줄기였는데 오후가 되면서 국수자락처럼 빗줄기가 굵어졌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굵은 빗줄기 탓에 궁궐 문이 닫힌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다. 오늘 방문할 곳은 경희궁. 1617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5년째인 1623년에 완성되었다는 조선후기의 이궁.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영조36)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이라고 불리었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이라 하여 서로 대비되는 궁궐로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인조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했다는 데 그중에서도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밖을 나오니 인적이 없다. 거뭇거뭇한 날씨에 문 닫힌 상점가. 이거 으스스한걸. 나는 지도를 꺼내들어 앞을 걸어갔다. '가만있자, 역에서 5분정도 직진 이랬으니 이 길이 맞지?' 그렇게 몇 발자국 걸었을까 나는 마주해서 오던 사람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아야야."

사과하려고 우산을 뒤로 젖히고 앞을 보니 쪽진 머리를 곱게 뒤로 빗어 넘긴 할머니가 얼굴을 찡그리고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대고 서있다. 요즘사람 같지 않아 보이는 고고한 품위가 그녀가 입고 있는 한복 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부드러운 비취색의 한복.

"할머니, 괜찮으세요?"

"으응, 나는 괜찮아요. 아가씨는 다친데 없나요?"

"죄송합니다. 제가 초행길이어서..."

"나도 여기가 영 낯선데, 아가씨는 어디 가는 길이었누?"

"경희궁이요."

"경희궁? 나도 경희궁에 가던 참이었는데."

"그러세요? 제가 모실 테니 함께 가요."

"그럴까?"

 

우리는 굵은 빗줄기 속에서 함께 길을 걸어갔다. 궁금했다. 이런 날씨에 할머니가 밖에 다니는 이유가 뭘까? 장사하는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고. '뭐 서울에는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하고 무시하려 했으나 나는 참지 못하고 할머니에게 여쭤보았다.

"할머니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 데 경희궁엔 어쩐 일이세요?"

"오늘 거기서 중요한 사람을 만나기로 했지요."

"경희궁에서요?"

"네."

"별난 사람이군요. 다른 데서 만나도 될 텐데."

"그러게요, 호호호. 아가씨 이름이 뭔가요?"

"김은서라고 해요, 할머니 말씀 낮추세요."

"호호, 아가씨도 어엿한 어른이신데 초면에 말을 놓을 수야 없죠. 본관은 뭔가요?"

"안동 김씨요. 본관을 여쭈어 보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옛사람들은 원래 이런데 관심이 많은 법이라오. 안동 김씨라면 양반가문

이로군요. 그래서 아가씨가 예의가 밝군요."

 

단순한 나는 칭찬에 금방 기분이 좋아져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고맙습니다."


우리는 우산을 맞대면서 경희궁 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며 말을 했다.

"아가씨 직계 조상님들 중에 유명했던 사람이 있나요?"

할머니가 내게 여쭤보았다.

"방랑시인 김삿갓을 아시나요?"

"알다마다요. 그 분의 시를 참 좋아하지요."

"옛날 일이라 잘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어렴풋하게 할아버지에게 들은 얘기로는

처음에는 우리 집안도 청백리 가문이었는데 조선시대 말에 외척세력으로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다고...그래서 업이 많아 자손이 귀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저의 친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저도 외동이에요. 근데 할머니 이거 진짤까요?"

여까지 이야기 하는데 내 얘기를 듣는 할머니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제가 오늘 만나야할 사람이 아가씬 것 같군요. 내말 잘 들어요. 오늘 여까지 오게 된 것은 아가씨께서 조상님들이 했던 일의 마지막 해업(解業)을 하기 위해서지요.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을 거예요. 좀 있으면 이상한 일이 벌어질 거예요. 하지만 놀라지 말고 그 분들이 하는 말을 잘 들어주세요. 그러면 아가씨 일도 끝나게 되요. 알았지요?"

"그게 무슨..."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과거의 질서를 어그러뜨리면 안 된다는 것. 그 순간 영영 과거에 살아야할 수도 있을 거예요.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은 명심하세요. 그리고 아가씨의 모습은 만나야 할 사람들 눈에만 보이니 쓸데없이 과거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그 분들이 하는 이야기만 잘 듣고 오세요. 내가 전해줄 말은 이까지예요. 그 일이 끝나면 현재로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네?"

 


이상한 할머니였다. 그런데 말하는 거나 표정으로 보아 농담하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할머니의 걸음걸이나 옷차림 그리고 말투가 너무 정정하다. 나이가 들면 치매가 온다는데 이 할머니도? 그런데 우리 둘을 둘러싼 공기가 묘하게 달랐다. 나를 둘러싼 공기는 이 도시가 뿜어내는 모든 것으로 둘러싸여 매캐한 느낌이 들었는데 할머니를 둘러싼 공기는 물처럼 투명하고 맑은 막이 둘러싼 것 같았다. 게다가 할머니에게서 풍겨 나오는 포스가 이 세상사람 같지 않게 무척 곱다.

 


***

 


"할머닌 누구세요? 저를 아세요?"

 

할머닌 대답은 않고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내게 인사를 했고 나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잠시 후 고개를 들어보니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귀신에 홀리는 걸 이런 경우를 말하는 거지?' 나는 할머니가 사라지고 없는 방향을 향해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새 궁궐 입구에 도착했다. 거대한 숭정문이 당당한 자태를 드러내고 문이 주는 엄숙함에 빨려들어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해설사에게 설명을 듣고 있다. 나도 슬쩍 그 무리에 끼어들었다. '이런 식으로 공짜로 역사공부 하는 거지.' 예전에는 꽤 컸을 궁이었을 텐데 현재 남아있는 궁궐은 여기가 정말 궁궐이었나 싶을 정도로 작다. 일제 강점기 때 거의 다 파괴되었다는 게 해설사의 설명이었다. 우리나라가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역사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직접적인 현실을 마주 대하자 마음이 아팠다. 힘없는 나라의 서러움이 이런 것이었을까. 어제 보았던 창경궁도 없어진 건물들이 많아 허무했는데 경희궁에서 똑같은 감정을 경험하다니. 우리는 입구인 숭전전을 지나 편전으로 쓰였다는 자정전으로 향했다. 해설사는 뭐라고 설명하고 우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건물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른 건물로 향할 때 따라가지 않고 건물둥치에 기대에 자정전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이 곳이 수많은 임금들이 치세를 펼쳤던 곳인가. 왕권과 신권을 다투면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했겠지. 무섭구나 무서워. 무대의 주인공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데 건물은 지금까지 남아 당시를 말해주는 것 같구나. 자정전이여, 그대는 이 땅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겠지요.'

 

나는 쓸쓸한 마음이 들어 붉은색 건물기둥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때 손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이 울려서 그런 걸까? 미세한 진동은 점점 커지더니 건물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지, 지진이야."

나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건물기둥을 힘껏 붙잡았지만 건물은 점점 더 세차게 흔들렸고 나는 그 힘에 못 이겨 땅바닥에 쓰러졌다. 누운 채 주변을 바라보면 주변건물이 하늘과 함께 뱅글뱅글 돌아갔다. 저 멀리 사람들을 불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난 이대로 죽는 걸까. 오늘 일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잠시 후 나는 어지럼증에 정신을 잃었다.


- 김예진 作 정조 이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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