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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재 문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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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야문답 # 2 - 김예진

문예관 조회 수 1859 추천 수 0 2015.06.30 12:17:18


하나 둘, 하나 둘.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지금으로썬 알 수 없다. 내 이름은? 김은서. 오늘 온 곳은? 경희궁. 아까 있었던 곳은? 자정전. 여까지 떠오르자 안심이 되어 눈을 떴다. 그러자 흔들거리는 붉은 불빛이 눈 속으로 쏟아졌다. 누가 방에 초를 켠 것이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자 흐릿한 시야가 점점 또렷해지면서 천정이 눈에 들어왔다. 형광등이 있어야할 그 자리엔 사람의 그림자가 너울거리며 비췄다. 눈동자를 왔다 갔다 굴려보니 천정에 비친 그림자는 두 개. 그렇다면 나 말고 이 방에 한 사람이 더 있단 말인가? 나는 섬뜩해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그머니나."

일어나 보니 저 만치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누워있다. 허억!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나 납치된 건가?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러자 그 할아버지는 연신 기침을 해대며 겨우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너...너는 저승사자인가?"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할아버지. 여기 도대체 어디에요? 저 이상한 데로 끌고 오신 거 아니에요?"

 

당황한 내가 속사포를 쏘듯 말하자 할아버지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힘이 없는 까닭인지 몸을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를 도와드리러 곁에 다가갔다. 그런데 그의 몸에 손을 데려는 순간 할아버지가 귀청이 떨어질 듯 고함을 치셨다.

"어허! 무엄하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화들짝 놀란 나는 할아버지에게 뻗은 손을 급히 거두어 들었다.

"도와드리려고."

"네 이년, 지금 무슨 짓을 한지 아느냐?"

이쯤 되자 나는 은근 화가 났다.

"도와드리려고 그랬던 것뿐이라고요."

"이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여기 이 년을 당장 밖으로 끌어내라."

 


할아버지가 외치자 밖에서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근데 이 사람들 복장이 나와 다르다. 청록색 저고리하며 가체에다 엄숙한 저 표정은 언젠가 사극에서 보았던 최상궁! 엄마야, 나 지금 영화 세트장에 와 있나? 사람들이 들어오자 할아버지는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년이다, 저년. 저년을 당장 하옥하라."

 


***

 


방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방향인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사람이 할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전하, 무엇을 말이옵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사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는 세차게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저기 저놈이 보이지 않는다 말이냐? 이상한 행색을 하고 앉아있는 저놈이?"

할아버지는 이번엔 일어서서 직접 내 곁으로 와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는 이제야 말로 죽었다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까 그 사람은 다시 할아버지를 향해 대답했다.

"전하....고정하시옵소서."

그가 이렇게 말하자 함께 들어온 사람이 모두 엎드려 절을 했다. 이번엔 할아버지가 날 향해 물었다.

"너는 내가 보이느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할아버지는 다시 사람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눈에는 얘, 얘가 보이지 않느냐?"

그러자 사람들이 대답했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사람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속삭이는 소리를 가만 들어보면, '전하가 드디어 가실 때가 되셨나보다. 이일을 어쩌면 좋누.' 라고 했다. 이 분들 표정을 보니 연기하는 것 같지는 않고, 세트장이라고 하기에 옷이며, 건물들이 너무 리얼하고 여기가 대체 어디일까. 할아버지를 쳐다보면 그는 난감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침전에 든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둘만 남게 된 방안. 이상하군, 저 사람들 눈엔 내가 보이지 않는 걸까.

 


***

 


모두가 나가고 우리는 어색한 침묵 속에 들어앉았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이 할아버지는 누구신가. 이런저런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날 불렀다. 아까보단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얼마 전부터 잠이 들려 할 때마다 한 무리의 저승사자들이 나타나 나를 지켜보곤 했다. 내 나이도 이제 80줄에 들어섰으니 지금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 너는 날 데리러왔는가?"

"아닙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방금 전만 해도 이런 건물은 없었는데..."

"바른대로 말하라. 뭣 때문에 날 찾아 왔는가?"

뭣 때문이라. 나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설명을 한다? 내가 우물쭈물 하자 할아버지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손으로 때리며 말했다.

"어서, 어서 말하란 말이다. 왜 나를 찾아 왔는가? 너는 나를 죽이러 온 것이지?"

"할아버지 설마 제가. 저는 파리 한 마리 죽이는 것도 무서워해요."

"거짓말 마라. 내가 죽을 때가 된 걸 알고 찾아온 저승사자 아니더냐!"


정신이 나간 이 할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하지? 서울에 오자마자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렇게 엮이는지 모르겠네. 나는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몰래카메라 프로그램이라도 진행하는 가 싶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방에는 카메라처럼 보이는 물건은 없고 대신 병풍과 작은 책상과 촛대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세트장 치고는 물건들에 손때가 묻어 있어 실제로 쓰는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지 옷도 덮고 있는 이불도 자세히 보면 오래 쓴 물건에만 볼 수 있는 헤진 자국이 군데군데 나 있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찬찬히 생각했다. 새벽에 고향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길을 몰라 지도를 보고 걷다 마주오던 할머니와 부딪쳤지. 그 할머니 분위기가 묘했었다. 나에 대해 이런 저런 질문을 하시더니 궁에서 이상한 일이 생길 거라고 했지. 그 할머니 말이 사실로 된 걸까?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시간의 흐름을 역행 할 순 없다. SF잡지에서 타임 슬립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SF니까 가능한 거지. 하지만 이상하다. 그런데 어째 시간의 흐름이라는 말에 내 가슴이 심하게 요동친다. 정말 원하지 않지만 그 일이 사실이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 정말로 과거로 온 것이면 어떡하지? 창호지를 바른 창문, 나비 모양의 녹이 낀 촛대, 손때가 묻은 작은 책상, 할아버지 뒤에 드리워진 병풍. 방에 있는 소품들은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워낙 안티크 마니아가 많으니까 이 할아버지도 그런 걸까? 그렇다면 아까 그 가체를 쓴 사람들은 뭐지? 돈이 무지 많아서 집에서 부리는 사람들에게 그런 복장을 입혔을 수도 있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워 헷갈려 하는 나에게 할아버지가 다시 말을 걸었다.


"이보게, 저승사자."

"할아버지 저는 저승사자가 아니라 대한민국사람. 할아버지 대한민국 아시죠? 대~한~민~국!"

그러나 할아버지는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니?'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대한민국이 어디냐? 여기는 조선이다."

"하하, 할아버지 농담도 심하시지. 조선이 언제 사라졌는데..."

"무엄하다, 나라의 국부인 내가 엄연히 살아있는데 어찌 조선이 사라진다는 말을 하느냐, 고얀~것."


아까 길에서 만났던 할머니도 그렇고 할아버지도 정신이 약간 오락가락 하시는 분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태연히 하다니. 그러나 저러나 여기는 꿈속의 세상인가? 아까 쓰러진 기억이 있는데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걸까? 이곳에서 벗어나려면 어떡해야 하지? 일단 할아버지가 하자는 대로 따라야한다. 그런 다음 틈을 봐서 여기서 빠져나가야지.


"할아버지 올해는 무슨 해인지요?"

"을미년이다."

조선시대이고 을미년이라, 임진왜란 이전인가 이후인가.

"임진왜란을 아시는지요? 이미 일어났는지요. 아니면 예전 일인지요?"

"임진왜란이라면 선조 임금 때 일 아니던가. 오랜 전의 일이다. 그 일만 아니었어도...조선은 부강해졌을 터인데."

선조이후 을미년이면 지금은 언제일까? 임진왜란이 1592년이고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구용이고 천간이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니까. 맞다, 을미사변이 1895년에 있었지. 그렇담 지금이 1895년이거나 1835년 아니면 1775년이겠구나.

"할아버지 혹시 고종임금이세요?"

"어어 무엄하다. 아무리 저승사자라 해도 감히 나를 할아버지라 칭하다니."

"고정하시옵소서.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헌종?"

"어허! 무엄하대도."

헌종이 아니신가? 그러면 내가 온 시간은 1775년.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니 전하는 혹 연잉군이라 불리셨던 적이 있으신지요."

"발칙하구나. 감히 나를 그리 부르다니."

"망극하옵니다. 이 저승사자 제대로 찾아왔는지 확인하고자 여쭈어 보는 것이니 고정하여 주시옵소서."

"그렇다. 어좌에 오르기 전 연잉군이라 불리었다."

 


이 할아버지 심각한 표정으로 농담을 잘하시는 군.


나는 영조시대에 떨어졌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아까 이상한 할머니가 내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다시 나올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영조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다행이 임금은 나를 저승사자로 착각하고 있다. 근데 무슨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걸까? 아까 할머니가 얘기하셨던 조상님들의 업과 관련된 것이라면 역사상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여쭈어야 하는 걸까. 영조임금이 풀어야 할 이야기가 뭘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애민군주였다는 평가를 받고 계시지만 경종임금의 죽음과의 연계성 그리고 아들을 뒤주에 죽게 만든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거기에 대해 후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것이다. 여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임금께 고개를 숙여 말했다.


"전하, 저는 진실을 듣고자 합니다."

"진실?"

"전하께서 가슴 속에 묻어온 이야기를 말입니다."

"내가 가슴 속에 묻어온 이야기라."

"그 이야기를 풀어놓으셔야 전하도 후손도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그대가 내게 온 이유가 그것인가."

"전하께서 이 모든 사건의 단초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건이라 하면?"

"정조, 아니 지금의 세손저하와 사도세자께서 꿈꾸었던 조선의 개혁 말입니다. 그 문(門)을 전하께서 여는 역할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인가?"

"네, 삼대에 이어지는 개혁정치의 시작은 영조임금께서 문을 열어야 했지요. 그러나..."

"그러나..."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유는 전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그러자 임금이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나도 할 만큼 했다."

"네, 전하는 애민군주로 백성들의 사랑하는 마음이 남다르셨다지요. 하지만 마지막에 진실을 밝혀주신다면 조선은 더욱 더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너는 과연 사자의 전령이구나. 혹 나의 아들 사도세자가 보낸 것인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전하, 이날 이때까지 마음속의 말들을 하지 못해 괴로웠던 것은 전하 자신 아닌지요. 이제 이 저승사자에게 훌훌 털어내소서."

전하는 말이 없으셨다. 그리고는,

"그래야만 하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임금의 얼굴이 굳어지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잠시 후 임금은 결심했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알겠다. 그리하는 게 내 저승길로의 편안한 여정과 이 나라의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는 길일게다."


- 김예진 作 정조 이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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