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학교 수선재 - 맑게 밝게 따뜻하게
로그인 | 회원가입 | 사이트맵 |
수선재 문예관
HOME


우주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파르네 성단의 6점 성대 지점에 백황색으로 반짝이는 별이 있었다.
인리튼 은하의 이베린 성.
아리스와 하론은 이베린 성의 진화된 인류로서 가까운 사이였다. 깨어있는 시간을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하도록 만드는, 둘의 공통된 관심사는 타 행성의 자료를 수집, 분석하는 것이었다.
다른 행성들의 생성, 발전과 소멸을 보고 있노라면 단순한 지식의 충족 이라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무엇인가를 조금씩 벗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어느날, 초장파 기측 망원경으로 k-78 아루이 은하를 관찰하고 있던 하론은 초록으로 밝게 빛나는 별을 발견했다.


“아스?”
천체지도에서 찾아낸 흥미 있는 이름이었다. 그는 즉시 광(廣)정보망에 접속하여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그의 등급에서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얼마되지 않았다.
“이런, 자료가 얼마 되지 않잖아…”
하론은 투덜거렸다. 항상 능력의 한계에 불편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하론? 뭐하고 있죠?”
하늘빛의 푸른 눈에 황금빛 곱슬머리를 가진 아리스였다. 그녀의 기적인 몸은 반 투명한 백색을 띄고 있었다.
“아리스! 이리 좀 와봐.”
기측 망원경을 본 아리스는 말했다.
“특이한 별이군요. 무척 아름답지만 상당히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렇지? 이런 류의 별은 처음이야. 아스라는 행성이지”
“아스?”
“광 정보망을 뒤져보아도 내 수준에서 알 수 있는 자료는 이 별의 역할이라는 ‘급속진화’란 단어 뿐이야.”
“급속진화…”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화를 통해 자신의 의식을 확장하고 능력을 향상시켜 우주의 발전에 더욱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바램이 아니었던가.
이베린 성에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현재에 만족하고 자신의 위치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때때로 좀 더 발전적인 것을 원하는 사람들. 둘은 후자의 경우였다.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시도하려 하였으나 등급에서 오는 능력의 한계라는 벽에 부딪히는 것이었다. 결국 방법은 진화 밖에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베린 성에서의 진화, 즉 등급의 향상은 너무나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지고, 또한 그 세월 만큼의 노력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일 만큼 더디게 진행되며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입장의 그들에게 ‘급속진화’가 목적이라는 아스는 매혹적인 이름으로 다가왔다.
“시간을 두고 자료를 수집해보기로 하지.”
“저는 아버지에게 한번 여쭈어 볼께요.”
 
다음날, 아리스는 날이 밝자 마자 찾아왔다.
“하론, 놀라운 소식이 있어요!”
“아스에 대한 소식이라도 있는 거야?”
하론은 세수도 안 한 얼굴로 눈을 비비며 물었다.
“아스에서 일주일 전 귀환하신 케이튼이라는 분이 있대요. 현재 승급 후 고등성(高等星) 관장 업무를 위임 받으셨다는군요.”
“그래? 일단 뵈러 가보자.”
 케이튼의 눈빛은 자신감이 넘쳤다. 부드러운 미소에 굳게 다문 입술은 외유 내강의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것 같았다.
“저는 하론이라고 합니다. 현재 2등급으로서 이베린 성의 신전(神殿) 건축을 맡고 있습니다. 이쪽은 친구 아리스라고 합니다.”
아리스가 말했다.
“이렇게 만나 뵐 기회를 주셔서 영광입니다.”
“나 역시 그대들 같이 생동감 있는 젊음을 만나면 반갑네. 아스에 대해서 궁금하다고 했던가?”
“네. 그 동안 여러 별들을 관찰해 왔지만 아스처럼 특이한 별은 처음이었습니다. 상당히 다양한 구조로 이루어진 것 같은데, 저의 등급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급속진화’란 단어 뿐이더군요.”
“아스… 참 아름다운 별이지… 그만큼이나 어려운 별이기도 하고… 지름길은 경사가 가파르듯이 빨리 진화할 수 있다는 조건은 그만큼의 댓가를 요구한다네. 자칫하면 경사에서 구를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지.”


* * *


케이튼에게서 들은 아스에 대한 정보는 놀라운 것이었다. ‘급속진화’를 위해서는 그 별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인 고도의 기적 응집체를 몸으로 삼아 수련을 거친다는 것이다. 이 몸은 마음의 움직임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게 된다. 주위의 환경 역시 복잡하고 급속도로 변화하며 다양한 자극을 준다. 이러한 엄청난 하중을 이겨내고 본래의 자신을 되찾는 과정 자체가 의식을 단련시켜 후에 몸을 벗었을 때 그 능력치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상승되는 것이다.
집에 돌아온 하론은 아리스에게 말했다.
“정말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기회야. 난 반드시 가겠어.”
“하지만 하론, 위험하다잖아요.”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이 별에서 수 만년간 지루한 과정을 거치느니 차라리 힘들어도 화끈하게 끝내고 싶다구. 아리스는 어때?”
“전…”
“그래, 자신이 없으면 여기에 남아. 어차피 아스에서 같이 공부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걸.”
“. . .”
아리스는 걱정되는 눈빛으로 하론을 보았다.
“유호페 엘 브리다스.”
하론은 눈을 찡긋 하며 말했다. 그들이 발견한 별 중 하나인 히로안성의 고대어였다. 희망은 모든 것을 밝힌다는 뜻으로 유난히 걱정이 많은 아리스에게 하론이 항상 버릇처럼 말하는, 그들끼리의 일종의 암호였다.
“금방이야. 50time(1time은 지구의 시간으로 15개월) 정도만 기다리면 돼. 자신 있다구.”

 
* * *

 
하론은 은하 회의에 자신의 수련 의지를 통보하러 갔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원로가 물었다.
“하론은 어떤 이유로 아스에서 수련을 하길 원하는가?”
“능력을 좀 더 키워 높은 차원의 업무를 수행하고 싶어서 입니다.”
“아스에서의 수련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는가?”
“물론입니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한가지만 묻겠다. 수련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마음의 조건은 무엇인가?”
“첫째 정성입니다. 정성은 에너지의 집중입니다.
 둘째 믿음입니다. 믿음은 에너지의 방향입니다.
 셋째 사랑입니다. 사랑은 에너지의 확장입니다.”
“좋다. 그대의 가능성 만큼 좋은 결과를 이루고 귀환하기를 빈다. 수련을 준비하라.”
“감사합니다.”
하론은 나는 듯 집으로 뛰어왔다.
“아리스, 드디어 결정이 났어!”

 
* * *

 
xx일 oo시.
은하회의장 내의 기화 전송실.
수련생은 이 기화 전송실에서 몇 가지 과정을 거친 후 전송기를 통해 아스로 전송되어 물질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
첫째. 현재의 기억과 능력을 잠재의식 속에 주입시킨다. 극히 미세한 기적 입자로 변화시켜 전송되는 과정에서 모든 외부의 기억과 지식이 소멸되기 때문에 잠재의식에 각인을 시켜 전송을 하고, 수련생은 수련과정 속에서 자신의 원래 기억과 능력들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둘째. 수련의 난이도를 선택한다. 난이도가 높을 수록 정해지지 않은 조건들이 많아지며, 극단적인 판단의 상황이 자주 닥치게 된다.
셋째, 수련과정 중의 정해진 부분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셋팅한다.

아리스는 기화 전송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와 있어야 할 하론이 없었던 것이었다.잠시 후 하론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정말 느긋도 하시군요. 이렇게 긴장되는 시기에..."
"아아~ 미안해 아리스. 여러 곳에 인사좀 드리고 오느라..."
"이제 게이트가 열릴 시간이 30분 밖에 남지 않았단 말예요."
"뭘,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걸. 잠재의식 각인과 수련 프로그램 셋팅은 어제 다 끝내 놓았다구."
"저와 작별하는 것은 아쉽지도 않나보군요."
"그렇지 않아. 50타임만 기다리면 되잖아? 금방일텐데 왜 그리 안절부절 못하지?"
"그래도..."
“유호페 엘 브리다스!”
하론은 눈을 찡긋했다.
“어휴…”
둘은 전송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던 전송 담당자가 말했다.
"천하 태평이군. 수련 전송 30분 전에 오는 사람은 내가 이 업무를 맡은 2만년 동안 처음이네."
"죄송합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하론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자자. 질책은 멋지게 귀환한 후 하기로 하고, 어서 난이도 셋팅을 하라구."
"70%로 하겠습니다."
"70%씩이나? 하론! 너무 위험해요."
"괜찮아. 나도 생각이 있어. 케이튼 말씀에 현재 지구에 8등급의 소리안이라는 분이 수련을 완성하시고 후학들을 이끌어 주시고 계시다잖아. 처음엔 힘든 과정을 거치더라도 일단 그 분을 만나 뵙게만 되면 그 후는 일사천리야."
"… …"
"어차피 자주 가는 것도 아니고, 맘 먹고 가는 것인데 기왕 가는 것, 크게 한건 해야 하지 않겠어? 소리안께서 계신 지금이 절호의 찬스라구."
"…아무튼 멋지게 끝내고 오길 빌어요."
하론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아리스는 뭔지 불안했으나 내색을 할 수 가 없었다.
“자 이제 공간 도약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하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담당자가 말했다.
캡슐이 닫혔다.
캡슐 안에서 하론은 웃으며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리스는 하론의 잠재의식 각인 목록을 훑어보고 있었다.
걱정하지마,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니까.

휘잉…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캡슐 주위로 서서히 뿌연 기운이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캡슐 밖으로 보이는 아리스는 무엇을 찾는지 목록을 계속 보고 있었다.
‘가기 전에 얼굴이라도 볼 것이지…’
순간,
아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당황한 표정이었다.
급하게 뭐라고 말을 하며 담당관에게 손짓을 했다.
뭐지?
바깥에서 자신에게 뭐라 하는 아리스의 입 모양을 보고 그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았다.
‘진리안!!!(眞理眼-진리를 알아보는 눈)’
너무나 당연시 되는 것이라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빠뜨린 것을 몰랐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어있었다. 캡슐을 휘감은 기체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고, 커다란 눈으로 바라보는 아리스와 담당관의 모습이 환한 빛으로 흐려지며 하론의 의식은 깊이 빠져들었다.
 
 
* * *
 
 
아스를 구성하고 있는 대륙의 하나인 아틀란티스.
어느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발달된 문명 속에 인류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추구하고 있었다. 수많은 삶 중에 그의 삶은 유난히 고난의 연속이었고, 모든 것들이 그를 압박해왔다. 뭔가 이유가 있는 듯이 느껴졌고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 다녀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 그는 운명의 수레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 * *


2만년 후, 라이튼 은하 회의.
의원들이 빽빽이 들어찬 콜로세움의 중앙에서 흰 수염의 장로가 말했다.
“우주의 스케줄에 아스로 우주 기운의 흐름이 집중되는 시기가 되었소. 아스에서 수련의 끈을 놓치고 방황하는 수련생들을 복귀시킬 기회가 왔소. 이번 기회가 지나면 3만년 후에나 다시 아스에 기운이 집중될 것이오. 인도자로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는지 각자 추천을 해 보시길.”
“제가 가겠습니다. 장로님.”
미리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던 듯 즉시 일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푸른 눈의 금발, 아리스였다. 반투명한 황색의 몸은 그동안 그녀의 영격이 상승했음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아리스. 그 간의 공적과 수준으로 볼 때 그대라면 믿을 수 있겠군. 건투를 빌겠소.”
“감사합니다.”

 
* * *

 
각인과 난이도 조정, 프로그램 셋팅을 마친 후 그녀는 캡슐로 들어갔다. 예전에 하론이 전송되었던 그 캡슐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의식을 낮추었다.
‘하론…’
환한 빛이 감싸 들며 머리 속에서 아득히 멀어져 가는 단어였다.

 
* * *

 
그 후 20여년 지난 2000년 아스의 작은 반도.
네온이 번쩍거리는 거리를 지나 어두운 아파트에 돌아온 호준은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던졌다. 머릿속이 터질 것 처럼 묵직했다. 잠시 죽은듯 엎드려 있던 그는 자리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우우~ 머릿속의 모든 생각들을 비워 버리기라도 할 듯이 길게 담배 연기를 내쉬었다. 그가 담배를 피우는 습관은 좀 독특했다. 연기를 아주 길게 조금씩 내쉬는 것이었다. 그러고 있노라면 몸 속에 찌든 삶의 잔재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에이, 어차피 끝난 일, 원망해 봐야 뭐하겠냐. 나만 괴롭지.”
그는 다시 자리에 벌렁 누웠다.
내일부터 다시 일거리를 구해야 할 판이었다. 천성적으로 아니다 싶으면 굽히지 않는 성격은 이번에도 회사의 고용주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해고당한 것이었다.
항상 같은 패턴이 반복이 되자 낙천적인 성격의 그도 의기 소침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잘못된 것일까?
바보 나라에서는 바보 행세를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나의 삶을 되돌아 봐야 할 것인가?
그간의 삶을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왔던가…

호준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태어났다. 어머니의 품팔이로 두 식구가 근근히 살아갔다.
그는 어떻게든 성공을 하여 다리 좀 뻗고 살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라면에서 만큼은 벗어나고 싶었다. 대학 입학때 까지는 말 그대로 ‘헝그리 정신’으로 공부를 했다. 학교와 집을 오가며 움직이는 시간이 거의 없이 공부만 했으므로 몸이 많이 망가졌다. 축농증은 만성이 되었고, 대학 입시 준비때는 엉덩이에 종기마저 나서 앉지도, 엎드리지도 못하고 누워서 책을 보아야만 했다. 지독하게도 힘이 들었다.
그런 그를 결코 포기하지 않게 해준 한가지는 희망이었다. ‘실패는 당신이 포기한 그 때’ 라는 격언이 그의 좌우명 이었다. 세칭 일류대라는 곳에 입학을 해서 사회에 나서기까지 갖은 고난도 항상 ‘열심히 하면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녹한 것만은 아니었다. 약육강식의 먹이 사슬과 다를 바가 없는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어려서 배운 미덕과 양심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호준은 답답했다. 

이렇게 아웅다웅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차피 죽으면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것들이 아닌가. 왜 이런 것에 묶여 살아야 하지?

번번히 드는 의문이었다. 이런 마음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종교나 단체들을 찾아 다녀도 어느 정도일 뿐,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와, 그것을 직접 풀어낼 수 있는 명확한 방법을 알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눈 돌릴 틈도 없이 바쁜 삶에 그것마저도 마음 한구석에 접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에라, 잠이나 자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잖아…’

호준은 팔다리를 대자로 벌리고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급류를 따라 떠내려가는 것이었다. 거친 물살은 그를 어찌할 도리도 없이 몰아쳤고 여러 번 폭포를 따라 떨어졌다. 그는 살려달라고 소리치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올 틈도 없이 입을 벌릴 때마다 물을 벌컥 벌컥 들이켰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지푸라기 처럼 얇은 밧줄을 내밀었다.
호준은 생각했다.

‘이 얇은 줄이 나를 지탱할 수 있을까?’
“당신이 하기에 따라 동아줄도, 지푸라기도 될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었다. 누구인지 얼굴을 올려다보려 하는 순간, 호준은 잠에서 깨었다.

백수로서 간만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호준은 느지감치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면을 하고 간단하게 식사를 한 후 거리를 나섰다. 슬슬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콧노래를 부르며 팔자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골목을 나와서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서 있을 때, 맞은 편에 있는 평범한 차림의 여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파란 불이 켜지고 건너기 시작할 때, 호준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거리가 좁혀질수록 바람이 불어 자신의 몸을 통과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그녀를 지나쳐가자 그런 느낌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대로 그냥 스쳐가서는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력하게 들었다. 그는 뒤돌아 그녀에게 뛰어갔다.
“잠깐만요…”
뒤 돌아선 그녀와 눈빛이 마주쳤을 때, 그는 가슴에서 뭔가가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건 무슨 느낌이지?
단순한 이성에 대한 느낌이 아니었다.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마음의 준비를 하시길…”
이 목소리는… ! ! !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그녀는 가버렸다. 멍하니 서있는 호준의 몸은 이유없이 떨려왔다.

다음날 그의 집으로 편지가 배달되었다. 보낸 사람에 ‘a’라고 쓰여있었다.
‘당신의 모든 의문에 해답을 얻길 원하신다면 내일 오전 10시 00찻집으로 오세요’
편지를 쓴 사람은 어제의 그녀와 동일인일 것 같았다.
한 번 만나봐야 할 사람일 것 같아.
꿈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라고 부추기는 그의 느낌을 믿기로 했다.

찻집에서 만난 그녀는 그 전의 강렬했던 느낌과는 달리 역시 평범한 모습이었다. 깊고 맑은 눈빛만 제외하고는.
호준은 물었다.
“저를 알고 있었습니까?”
“오래 전부터죠…”
자기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이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제가 갖고 있던 의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셨죠?”
“차차 아시게 될 거예요. 그 전에 제가 하나만 여쭤 볼께요. 당신은 어떤 것을 믿으시죠? 어떤 기준에 따라 믿고 안 믿고를 결정하시나요?”
‘그야…’
쉽게 대답을 하려던 호준은 갑자기 혼란에 빠졌다.
어떤 기준에 따라 믿느냐고?
옳다고 판단되는 것을 믿는 것 아닌가?
그러면 내가 내리는 판단의 근거는 무엇이지?
나의 가치관?
나의 가치관에 맞는 것을 믿는 것일까?
그럼 그 가치관은 어디서 나왔지?
내가 이제껏 살아오며 ‘주위에서 보고 들으며’ 형성된 것 아닌가?
그것들이 전부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 상식이 옳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상식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도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서 나온 판단들이 옳다고 확신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면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짧은 순간에 의식이 뿌리 채 흔들렸다. 호준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일단 답부터 말씀을 드리지요. 올바른 판단의 근거는 기운과 말씀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영혼의 느낌에 따라 믿으세요.”
“… …”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아 보시지요.”
그녀가 말했다. 호준은 아이처럼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어느새 차분한 태도의 그녀에게 압도 당하고 있었다. 아니, 횡단보도에서 마주칠 때부터 이미 압도되어 있었다.
“몸을 편안하게 이완시키세요.”
잠시 후, 어제와 같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의 몸을 통과하여 지나쳐가는 느낌이었다. 잔뜩 짊어지고 있던 짐이 몸에서 벗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편안한 상태를 경험하고 있던 호준은 문득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에 놀랐다. 팔다리가 서서히 없어져가는 것이 아닌가! 몸통과 머리가 없어지고 두근거리는 심장마저 없어졌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감각이 사라진 것일까? 누워 있는건지 앉아 있는 것인지 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내가 없어져 버린 것일까?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무엇이 지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득한 상태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이제 기운의 맑음을 판단 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영혼의 느낌으로 말씀을 판단하세요…”
분명히 꿈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임에 틀림이 없어…

잠시 후 팔 다리의 느낌이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호준은 눈을 떴다. 느끼지 못한 사이에 그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메모 한 장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삶의 근원, 진정한 자신을 알고자 간절히 원하신다면 내일부터 100일간 매일 새벽 5시, 북쪽을 향해 천번씩 절을 하세요. 이제부터는 이전에 당신이 배웠던 단전호흡을 하셔야 합니다. 결과를 보고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지푸라기가 될지, 동아줄이 될지…'
뭔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느낌이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그새 한시간이 지나 있었다.
혼란함을 느끼며 담배에 불을 붙여 문 순간,
커헉, 숨이 턱 막혔다. 자동차 배기구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들여 마신 기분이었다.

 
* * *

 
띠리리… 띠리리…

4시 30분. 호준은 자명종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평소와는 달리 잠이 금방 가시고 몸이 가뿐했다. 간단히 세면을 하고 준비를 했다.
‘북쪽이라 했지…’
가볍게 인사를 드리고 절을 시작했다.
한번…
두번…

오백번…
땀이 흥건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구백 구십 구…
천번. 끄응…
끝나자 마자 침대에 털썩 누웠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새벽에 천번씩 절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첫날과는 달리 때로는 일어나기가 천근처럼 무거울 때도 있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힘들게 공부도 해냈는데 이까짓 것 쯤이야’ 하는 오기도 들었다. 어쨌든 해내기로 마음 먹었다.
다리가 단련이 될수록 절이 쉬워졌다. 몸에 힘을 빼고 절을 하고 있노라면 점점 가벼워져 왔고, 별 다른 노력 없이 기계처럼 자동으로 되는 것이었다. 절 하는 자신을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몸에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예전의 몸을 통과하던 느낌의 그 바람이었다.
100일이 다되어 가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얼굴색이 밝아지고 광택이 났다. 그리고 마음은 차분하고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었다. 호준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이런 변화들이 신기했다.
뭔가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어…
호준은 생각 이전에서 우러나오는 자신의 느낌을 믿기로 했다.


가뿐하게 절을 마친 100일째 되던 날이었다.
아침에 편지가 한 통 왔다.  ‘a’ 였다.
‘같은 방향으로 100일간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지나온 모든 세월을 참회 하세요. 하늘에 용서를 빌고 감사하는 마음을 키우시길… 밧줄이 굵어지고 있어 기쁘군요…’
그는 그대로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인생이 결정적으로 변화하는 시기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무의식 중에 바래온 것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다리를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저리기도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몇 시간씩 충분히 버틸 수가 있게 되었다. 그는 어릴때의 기억부터 자신이 지나온 날을 돌이키며 반성을 하기 시작했다.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살아온 자신이 불쌍하고 타인이 불쌍했다.
가슴이 텅 빈 공간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호흡이 더욱 가늘고 길어졌다.
따스하고 푸근해지기 시작하며 바닥에 기어가는 개미를 보아도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늘’이라는 단어를 생각만 해도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하늘…

100일째 되던 날, 편지가 왔다.
‘진전이 빠르시군요. 남은 100일,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으시고 이제껏 해온 과정을 복습하시며 나머지 시간은 좌선을 하시길 바랍니다.’
‘남은’ 100일… 어떤 일이 있으려나 보군…
호준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깊이 호흡이 빠져들었다.
모든 접촉을 끊고 천배, 합장과 좌선을 하면서 의식은 더욱 고요해졌다.
앉아서 호흡을 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전에 경험했던, 몸이 없어지고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몰랐다. 밤과 낮의 구분이 없이 졸리면 자고, 일어나면 앉아서 호흡을 했다.

100일째 되던 날,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에 호준은 문을 열었다. 밝은 표정으로 예의 그녀가 서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상당한 진전을 이루셨군요.”
“덕분입니다.”
100일만에 처음으로 말을 한 호준은 흠칫 놀랐다. 목소리가 몸을 울리는 것이었다. 마치 몸에 수직으로 꽂은 파이프에서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처럼.

둘은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질문은 없으신가요?”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몸 주위로 백열전구 같은 빛이 번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신기하기도 하지…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도, 별로 궁금한 것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좌선에 드시지요.”

그는 좌선에 들어 호흡을 시작했다.
후우우… 의식이 깊이 내려가며 슈욱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드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어느 순간 그의 몸이 까마득한 절벽의 바로 앞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아찔했다. 그는 흠칫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옆에 서있는 그녀가 말했다.
“저 아래에 당신이 찾던 모든 것이 있다면 뛰어 내릴 수 있겠습니까?”
어느새 인가 그녀의 복장이 바뀌어 있었다. 엷은 황색의 길게 늘어진 옷을 입은 그녀가 어디서 본 듯한 생각도 들었으나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 뛰어 내리라고? 나더러?
쳐다만 보아도 오싹한 곳을 뛰어 내리라니?
꿈일까?

꿈은 아니었다.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설령 꿈이라 하더라도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낭떠러지였다. 게다가 그는 고소 공포증이 있었다.
손에 식은 땀이 배어왔다.
이생각 저생각 많아지자 뒷머리가 묵직해져왔다. 등도 뻣뻣하니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간 상당히 고요해졌다고 생각했던 마음도 막상 목숨이 달린 일을 당하니 여느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할 수 없는가요?”
그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주저하며 낭떠러지 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진리안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까…”
실망한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호준은 그래도 이것 만큼은 할 수가 없었다. 다른 것은 뭐든지 하라면 하겠지만 높은 곳 만큼은 정말 두려웠다.
“그러면 여기서 마치기로 하지요…”
그녀는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우울한 듯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호준은 착잡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정말 귀중한 도움을 받았는데…
그녀 덕분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되었는데…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이렇게 끝나면 앞으로는 이대로 살아가야 하나...

호준은 가슴에서 뭔가가 울컥 치미는 충동을 느꼈다.
낭떠러지로 뛰어갔다.
그의 느낌이 시키는 대로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날렸다.
“으아아…”
두려움이 온몸으로 밀려왔다. 순간, 머릿속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을 버리세요…’

모든 것…
그래. 나에게 이제 남은 것은 없다…

갑자기,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 몸에 전율이 왔다.
부웅~ 뜨는 듯한 느낌이 들며 세포 하나 하나에 강하게 기운이 스며들었다. 환한 빛이 온몸을 감싸 들기 시작했다. 몸을 구성하는 분자까지 샅샅이 분해되는 느낌이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황홀함을 느끼고 있을 때, 귓가에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원 속의 순간,
아스의 삶.
순간 속의 영원,
이베린의 기다림.

순간의 문을 여는 영원에의 열쇠,
정성, 믿음, 사랑.

영원의 입구에서 되살아나는
그대의 약속.

진화된 내일을 꿈꾸던
그대의 기억.

희망은 모든 것을 밝히리
‘유호페 엘 브리다스’

유호페 엘 브리다스…
그의 가슴에 다시 한 번 전율이 일었다. 슬라이드가 돌아가듯이 빠른 속도로 화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전의 기억들에서부터 알지 못할 영상들이 엄청난 속도로 스치더니 환한 빛으로 변해 그의 내부에서 폭발했다.
모든 기억들이 한 순간에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베린... 급속진화...
아스...
나는 누구였던가...
... ...
...
의식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다시는 흔들림이 없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빛이 잦아들며 그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웃음을 머금은 눈가에 물빛이 반짝였다.
“오랜만이군요, 하론…”
“너무 기다리게 했구나, 아리스…”
맞잡은 손에 기쁨이 흘렀다. 둘의 눈빛은 지나온 오랜 세월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 * *

 
이베린에서 기측 망원경으로 본 아스에는 두개의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두 빛의 만남은 또다른 수많은 빛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희망은 모든 것을 밝히리,
유호페 엘 브리다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8 문예관 난설헌 허초희: 허씨가문의 천재교육 1-김예진 수선재 2016-01-05 4787
17 문예관 [화답시] 난설헌시를 읽고 - 최경아 수선재 2015-12-17 4416
16 문예관 난설헌시를 읽고 - 김영호 수선재 2015-12-17 3038
15 문예관 그리움에 부쳐...- 박정배 수선재 2015-11-06 1629
14 문예관 오죽헌 - 김영호 수선재 2015-09-23 1578
13 문예관 평온과 여유는 힘 - 조애리 file 수선재 2015-08-27 1714
12 문예관 To live on a world - Storm Schutte 수선재 2015-08-12 1512
11 문예관 커피(화답시) - 최경아 수선재 2015-08-03 1635
10 문예관 라면 외 - 김영호 수선재 2015-07-20 1519
9 문예관 아파트 주민 000 - 이영아 수선재 2015-07-10 1626
8 문예관 월야문답 # 2 - 김예진 file 수선재 2015-06-30 1850
7 문예관 월야문답 # 1 - 김예진 file 수선재 2015-06-19 1843
6 문예관 봄은 그대에게서부터 왔다네 - 최현정 수선재 2015-06-09 1623
» 문예관 아스의 만남 - 매화달집 수선재 2015-06-01 1662
4 문예관 아버지와 아들 - 정리경 수선재 2015-05-21 2290
3 문예관 오로라 공주 이야기 - 장미리 수선재 2015-05-17 2025
2 문예관 아기 돌보기 - 최경아 수선재 2015-05-11 1619
1 문예관 자전거 이야기 - 매화달집 수선재 2015-05-06 1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