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학교 선생님

명상학교 선생님 문화영(文花英)1951~2012 명상학교 수선재의 선생님이자 선계수련의 안내자로 살다 가신 분이며, 선인(仙人)이 되신 분이다.

1951년 함남 원산에서 출생하시었고 강원도에서 성장하셨으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에서 정치학을,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민윤리학과에서 한국학을 전공하셨다. 이후 한국여성 개발원 창립멤버로서 한국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연구 활동을 하셨으며 국회, 대한적십 자사 등에서 일하신 적도 있다.

39살이 되던 해 사회 활동을 접고 수련의 길에 들었으며 선계의 스승이신 천강(天降) 선인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삶과 죽음의 관문을 넘는 극한의 수련 끝에 초각(初覺, 견성)을 이루셨다. 이후 우주의 진면목을 깨닫는 중각(中覺)과 우주와 합일하는 종각(終覺)의 경지 를 넘으시고 선인 인가를 받으셨다.

한편, 수련과 문학을 병행하시어 『현대문학』을 통해 희곡작가로 등단하셨으며, KBS <라디오 무대>를 통해 방송작가로도 등단하셨으며, 『광복50주년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홍범도』 『한국외교비사 남북외교의 시작과 끝』으로 한국방송대상 라디오드라마 부문 우수작품상을 두 차례 수상하신바 있다.

문화영님은 1998년부터 2012년까지 약 15년 동안 수선재의 ‘선생’으로서 제자들을 기르셨으며 그 과정에서 방대한 분량의 선서(仙書)를 남기셨다. 선서는 우주창조 목적, 지구창 조 목적, 인간창조 목적 등의 근원 진리와 더불어 호흡과 명상, 대선인과의 대화, 선(仙) 문화 실천 지침 등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으며 30여권의 책으로 출간된바 있다.

문화영님은 사명을 완수하신 후 2012년 향선(向仙)하셨으며, 이후 선계수련의 맥은 명상 학교 수선재의 제자들이 잇고 있다.

출생
당시 이야기

‘모도’라는 원산 앞바다에 있는 섬에 피난을 가서 저를 낳으셨는데, 피난은 한 9개월 전에 가셨다니까 아마 그 섬에서 계속 저를 뱃속에 가지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그 섬 안에서 저희 아버지가 또 행방불명되시고요. 수산 쪽의 일을 하시니까 그 섬에 있는 사람들을 전 부 데리고 내려오시겠다고 배를 구하러 나가셨는데, 안 돌아오신 거예요. 행방불명되셨어요. 한겨울에 나가서 안 들어오신 거죠. 그때 어머니는 만삭이셨다 그러시고요.

그런데 그 섬 안에서 다 굶고.... 원래 아홉 가구가 살던 섬이었는데 수백 명이 있다 보니 까 식량은 바닥나고 아수라장이죠.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날씨는 춥고.

가지고 가신 게 없었어요. 금방 피난에서 돌아오실 줄 알고 사진하고 비상약만 잔뜩 가지 고 가셨다고 그러시더군요. 페니실린이니 이런 약. 그 약으로 섬사람들을 치료해주시고 하면서 의사 선생님으로 통했다고 그러시네요.

어머니께서 옛날에 대학을 나오셨는데 이화여대가 선교사들이 만든 학교니까 농촌 봉사를 다니시면서 의료 이런 것들은 아셨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의사 선생님으로 통하셔서 병을 고쳐주고 쌀 한 줌 얻어다가 연명하고, 이렇게 하셨다고 하세요.

그런데 저를 가지시고 맨날 폭탄이 터지고 굶고 그러시니까 산모가 계속 얼굴이 부으셨다 고 그러세요. 못 먹고 하시니까. 쌀 한 말을 가지고 석 달을 사셨다고 그러시고요. 임산부 가 그렇게 굶으시니까 얼굴이 누렇게 뜨고....

이렇게 해서 제가 태어났는데, 굶은 상태에서 낳으시니까 어머니가 완전히 기진맥진하셨어요. 그래서 여잔지 남잔지도 모르고 한쪽으로 밀쳐놨다가 저녁에 정신이 들어서 보니까 여자더라 하시는데....

3일을 아무것도 못 드셨으니까 젖이 나올 리가 없죠. 또 갓난아이가 쌔근쌔근하면서 열이 많이 오르더랍니다. 그래서 들여다보면서 이 아이를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한참을 고민하셨답니다. 살려봤자 조금 있다가 죽을 게 뻔하니까요. 살아있는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운데 새 생명을 살려봤자.... ‘그래도 태어났는데’ 그러시고는 물을 끓여서 증류수를 만들 어서 페니실린을 섞어서 제 입에다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뜨려 놨더니 열이 내리면서 깨 어나더라고 그러세요.

그러니까 제가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지 못한 탄생을 한 거예요. 피난을 가서, 아버지도 안 계시고, 못 먹고.... 그때만 해도 오빠도 있어서 언니 세 명에 오빠 하나. 북한 사람이니까 남한에 가봐야 아무런 일가친척이 없어요. 그래서 3년을 거의 거지처럼 사셨다고 합니다.

아이가 따뜻한 방에서 자라야 되는데 그때 냉골이었답니다. 그러니까 갓난아이가 냉병이 들었던 거예요. 그리고 어려서부터 굶기를 밥 먹듯이 하니까 제가 몸이 건강할 리가 없죠. 아주 탄생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 몸만 좀 건강했으면 뭘 할 텐데’ 이런 생각을 평생 했어요. 체력이 받 쳐주지를 않으니까. 악으로 하고 깡으로 했습니다. 평생 제가 건강 때문에 장애를 겪었습 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제 인생이에요.

그 이후도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서 제가 과거는 다 잊어버린 상태에요. 생각하기 싫어서요. 언니들은 기억력이 좋아서 옛날에 이렇고 저렇고 이런 얘기 를 자꾸 하시는데, 더군다나 글 쓰는 한 언니는 시시콜콜 옛날에 고생한 얘기를 끄집어내 시는데 저는 아예 망각하는 병에 걸린 거예요. 수련하기 전에 이미 과거는 다 잊어버린 상태여서 과거 얘기하면 저는 하나도 몰라요. 의도적으로 생각하기 싫으니까 아주 모릅니다. 그렇게 하면서 수련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생이길래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만 하는가? 하여튼 저도 어려서부터 죽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어떻게 하면 죽을까? 맨날 살기 싫으니까, 귀찮고 재미없고 이러 니까. 일종의 우울병이죠.

제가 나중에 부처님에 관한 책을 보니까 부처님이 심한 우울증을 갖고 태어나셨더군요. 왕자로 태어났지만 매일같이 우울해서 웃지 않고 사색에 젖어 있고요. 왕이 큰일 났다 싶 어서 예쁜 여자들을 계속 들이고 해도 좋아하지 않으니까 일찍 결혼을 시켰더군요. 그래 서 부처님이 일찍 장가를 갔는데, 아무리 부인이 예쁘고 훌륭한 여성이어도 우울증이 낫 지 않다가 결국은 출가를 했잖아요. 왕자면 부러울 것이 없을 텐데....

이 수련의 인연에 든 사람들은 행복하면 수련을 안 하니까 그런 큰 장애요인을 가지고 태 어나는 겁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오신 분들도 그런 생각을 하실 텐데, 아주 크 게 모자라는 부분들을 갖고 태어나는 거예요.

저의 경우에는 가정환경이 불행했죠. 유복자에다가 축복받지 못한 가정이었죠. 또 신체가 허약한 상태였는데 극복하고 살아냈다는 것. 그래서 오늘 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54세를 지내면서 생일이 기쁘다는 생각을 제가 안 해본 거예요. 탄생이 기쁘지가 않은 거예요. 왜 나를 내보냈는가 원망도 하고. 어머니 왜 나를 내놨느냐? 이렇게 고생시 킬 것이면 왜 나를 났느냐? 따지기도 하고 그랬는데.

제가 사람으로부터는 축복을 못 받았는데, 다 늙어서 선계로부터 무지막지한 축하를 계속 받고 있습니다. 수련하면서 생일을 제일 축하해 주시는 분은 항상 선계시더라고 그랬는데, 그중에서 오늘 생일이 제일 행복하다....
- 2004년 3월 23일 하신 말씀입니다.

생각이
뿌리 뽑힐 만큼
앉았다

나보다 더 열심히 수련하는 사람을 구경을 못했어요. 내가 직장을 왜 그만두었느냐 하면 수련시간을 많이 갖기 위해서 그만둔 거잖아요? 수련이 너무 하고 싶어서....

직장에서도 점심시간 같은 때는 점심 먹고 혼자 수련하고요, 퇴근할 때는 지하철역에 딱 내리잖아요? 그러면 그때부터 막 뛰어가는 거예요. 천천히 걸으면 15분 걸리는데 뛰면 딱 7분 걸려요. 열쇠로 문 열고 들어가서 가방 탁 놓고 20~30분 숨을 푹푹 쉬고 나면 정신이 나면서 일어나서 뭐 하고 그랬습니다.

수련하고 싶어서 안 되겠다 그러고 직장에 사표를 냈잖아요? 1년 동안 사표 수리를 안 해 줬어요. 그렇게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온 이유가 단지 하나죠. 수련 시간 많이 가지려고. 집에 들어앉은 후부터는 내내 수련했어요. 저녁에는 일찍 자요. 새벽 3시가 되면 딱 일어 나요. 일어나서 그때부터 수련해요. 직장 다닐 때도 내내 그랬어요. 수련하다 보면 날이 새요. 날이 새면 아침 차려 주고는 직장 나가고 그랬죠. 그런데 수련하면서 밤샌 날은 안 피곤해요. 참 이상하더라고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아침까지 약 4시간 동안 수련하고, 그렇게 열심히 했어요. 계속 그걸 되풀이 했어요.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수련하고요. 와공을 주로 하고, 그 다음에 신법 수 련 하고, 저는 의식수련 이런것은 많이 안 했어요.

의식수련 하면서 앉으면 5분, 10분 정도면 깊이 들어가거든요. 그게 수련으로 단련된 겁 니다. 제가 굉장히 예민한 사람인데 수련하면 그렇게 금방 들어가서 바깥 소리가 안 들리는 거예요. 여기서 수련 지도할 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보고 듣고 하죠. 그런데 내가 개인수련 할 때는 그렇게 몰입을 해요.

그 비결은 바로 기초를 확실히 한 데 있습니다. 집에서 4~5년 동안 수련법 모르고 수련할 때는 와공밖에 못했거든요. 앉아서 하는 걸 안 했죠. 와공만 10시간 정도 계속했죠. 그래 서 기초가 튼튼히 돼서 집중을 잘 할 수 있었지 않는가 싶습니다.

저희 집이 아파트 1층이었는데, 아파트 현관문에서 집 입구까지 굉장히 길어요. 그런데 거기 현관문 밀고 들어오는 소리까지 다 들어요. 그렇게 예민한 사람인데 수련을 할 때는 전화가 오거나 남편이나 애들이 열 번씩 불러도 몰라요. 대답이 없어서 들어와 보면 수련 하고 있대요. 수련하면 그렇게 금방 들어가서 안 들리는 거예요.

여기까지 올 때까지 저는 굉장히 피 눈물 나게 치열하게 했거든요. 승부 근성이 있어서 한번 하면 끝을 본다고요. 제가 할 수 없거나 안 해야 하면 안 하는데, 일단 손을 대면 치열하게 끝을 보는 성격이 있어요. 아주 치열하다고요.

잡념 같은 것은 전혀 안 드셨어요? 처음에는 굉장히 많았죠. 제가 생각이 많은 사람이에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만 가지 생각 이 다 떠오르는 사람입니다. 30분 정도면 온 생각을 다 하는데, 그 생각만으로 수련하기 도 전에 지치는 거예요.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잠자리에서 30분 정도 뒹굴다가 지치고, 그 때부터 다시 자고 싶어요. 너무 생각이 많아서. (웃으심)

수련하면서 처음 몇 년 동안은 잡념이 많은지 들어가지를 못했죠. 4-5년을 그랬어요. 만 날 커피 마신 것처럼 기운이 붕 떠 있었어요. 머리에 기운이 떠 있어서 얼마나 힘든지 몰 라요. 수련을 열 시간 해도 그 기운 뜬 걸 잡지를 못하더라고요. 얼마나 잡념이 많은지.

그러니까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 버티는 거죠. 생각은 생각대로 숨은 숨대로. 괴로운데도 그렇게 했다고요. 그러다가 수련을 하면서 생각이 걷혔죠.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니까 그 다 음에는 생각이 안 나요.

그러니까 잡념을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예 끝을 따라가 보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떠오르면 잊어버리고 떠오르면 잊어버리고 하는 방법이에요. 그런데 저는 끝까 지 따라가 봤어요. 생각을 하도 하니까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그럼 그것이 정공법인가요? 사람마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해야 되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하고. 그런데 저는 워낙 많으니까 끝까지 따라가 봤어요. 따라가 봤더니 더 이상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우리집 애들이 뭐라고만 하면 ‘머리 복잡하니까 말하지 마’ 늘 그랬는데, (웃으심) 얼마나 생각이 많은지 터질 것 같죠. 걱정도 많고. 인정이 많아서 무슨 얘기를 들으면 다 접수가 되는 거예요. 누가 아프다는 소리를 들으면.... 남 아픈 것까지 다 참견하는 거죠. 얼마나 걱정이 많은지 사돈에 팔촌 걱정까지 다 해요. (웃으심) 제가 감당을 못하는 것까지 참견 하니까 그냥 쓰러지는 거죠.

하여튼 저는 끝까지 따라가 봤어요. 그러면 생각이 안나요. 너무 많이 해보면 안 난다고요. 그만큼 많이 앉았다는 얘기죠. 생각이 뿌리 뽑힐 만큼 했으니까.
- 2001년 4월 27일 하신 말씀입니다.

기회를
놓친 적이 없다

제가 수련할 때 0.1점 정도는 왔다 갔다 했어도 1점, 2점, 왔다 갔다는 안 했어요. 그리고 한 번도 기회를 놓친 적이 없어요. 저의 성향이 ‘집(執)’이라고 하지요. 한번 붙잡으면 놓지 않는 성격 때문에 수련을 끈을 붙드는데 성공했어요. 일단 잡으면 놓지를 않아요.

저는 발동 걸리기는 어렵지만 발동 걸리면 내쳐 가는 타입이에요. 가다가 떨어지거나 그 런 적은 없었어요. 0.1점 정도의 오차는 있었는데 기복이 심하거나 후퇴는 없고 매번 전진했어요.

수련과정이 완만하게 간 것도 아니고 고공비행을 했어요. 비행기 뜰 때 그렇게 하듯이 수 직상승을 했다고요. 수련과정이 가파르게 계속 올라갔으니 얼마나 정신없었겠습니까? 그 렇게 힘든 과정을 했다고요.

매일같이 몰아세우고 “수련을 안 하고 있을 수가 있느냐?” 이런 말씀이 굉장히 많은데, 이틀 수련 안 하면 그런 말씀이 나왔고 열흘씩 일주일씩 놀아본 적이 없어요. 하루 종일 수련하고 그랬는데, 하루 종일 수련 안하고 이틀 동안 놀면 “이렇게 수련을 안 하고 어떻 게 한단 말이냐?” 이러시면서 불호령이 떨어지죠. 불호령이 떨어지면 다시 하죠. 돌아옵 니다. 3일을 쉬어 본 적이 없어요.

연휴 같은 때 가족들하고 놀면 천서라도 받으라고 말씀하시고, 매일 하루 한두 시간하고 서너 시간하고 그런 것을 거른 것이 아니라 7~8시간, 10시간 수련을 매일 했다니까요. 그 러니까 지금 수련하시는 거보면 하품 나오죠. 그러고도 바라는 것은 잔뜩 바라니....
- 2001년 5월 26일 하신 말씀입니다.

1000일 안에
모든 과정을 마쳐

100일 수련을 열 번 하면 1000일 수련인데요. 1000일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긴 기간이냐 하면, 저의 경우는 1000일 수련 하면서 한 400일쯤 돼서 초각을 했고, 또 한 1년쯤 후에 중각을 했고, 또 1년쯤 후에 종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과정을 1000일 안에 다 마 쳤거든요.

제가 수련할 때는 지금보다 한 100배는 어려웠던 것 같아요. 지금은 단체수련을 하기 때 문에 너무나 쉬운 그런 과정이고, 기운이 지원되고 그러는데. 제가 수련생들을 보면서 참 이상하다, 생각을 합니다. 왜 안 할까? 왜 못할까?
- 2004년 11월 21일 하신 말씀입니다.

견성하실
당시의 심정

나는 그동안 수련에 대해 짝사랑만 해 온 심정이었다가 이즈음 나 자신과의 사랑을 뼈저리게 경 험하고 있었다. 어느 날의 일기에서 옮겨본다. 나를 만났을 때의 감흥은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표현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울고 또 울었다.
어느날의 일기
또 어떤 때는 시(詩)가 절로 나왔다. 옮겨본다.
어느때의 시
『선계에 가고 싶다2』에 실린 글입니다.

선계에
가고 싶다를
내면서

나는 길눈이 어둡다. 지하도에서 나오면 방향을 잘 잊으며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한다. 이런 습성이 인생의 길을 찾아가는 노정에서도 나타났다.
삼십이 넘어서야 기(氣)를 알고 도(道)의 바다로 향하는 뱃길을 보았다. 사십이 넘어서야 문학이라는 나룻배를 만들고 배를 젓기 시작했다. 올해가 기를 알게 된 지 만 십 년이 되 는 해이다.

오르던 길을 중지하고 내리막길에 들어서면서 나는 비로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여러 색 깔의 감정을 경험하였고 좀 겸손해졌다. 예를 들자면 짝사랑이라든가, 좌절이라든가, 소외 감 같은 것들을 말이다.

인생은 고해(苦海)였다. 몇 번이고 자살을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내 마음은 왜 그렇게 힘들고 외로웠는지 모른다.

공부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일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었다. 약 천 일간 금촉(禁觸)수련을 했는데 이 기간 동안 거의 모든 만남을 끊고 오로지 숨만 쉬었다. 최소한의 살림만 했다. 친구들은 하나 둘 다 떠나갔다. 도무지 사람 구실을 하지 않으니 누군들 좋아했겠는가. 힘 들 때마다 나는 단군신화를 생각했다. 그것이 힘이 되어 곰녀의 한 사람인 나는 드디어 최소한의 과정을 이수하게 되었다.

십 년 전 같이 공부를 시작했던 도반(道伴)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부분이 도중하차 했고 몇 사람만이 각자의 영역에서 일을 찾아 하고 있다. 공부란 끝이 없기 때문에 팔자 좋게 숨만 쉬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세상을 등진 공부는 반쪽이고 더불어 사 는 일에 성공할 때 완성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단지 나 자신에 도달하기 위해서 책을 쓰는 일을 시작했음을 고백한다. 이 글을 통 해서 친구들을 만나고 싶고 껍질이 수없이 벗겨지기를 원한다. 혼자 공부하는 것은 테니 스 운동으로 말하자면 백보드를 상대로 혼자 공 연습을 하는 것과 같다. 이제 나는 선수 들과 공을 치고 싶다.

깨달음으로 향하는 수도(修道)의 과정에 동참할 동반자를 구한다. 남녀노소 누구나 환영한 다. 특히 살고 싶지 않거나 우울하거나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하는 마음의 병을 앓고 계신 분들은 이 글을 통해서 아마도 동병상련의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될 것이다. 신비의 세계를 동경하는 분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정보를 같이 나누게 될 것이다.

첫 저서 『선계에 가고 싶다』를 내면서 쓰신 글입니다.

사명에 관한
이야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하시기 전에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지요? 조물주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바가 결국 그것입니다.
행복하기를 바라시는데 이왕이면 어여쁘게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행복해도 추하게 행복 하면 좀 그렇지요? 바라보기에 어여쁜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시집간 딸이 만날 와서 “못살겠다, 죽겠다” 하면 좋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왕 태어났으면 좀 행복해라, 기쁘고 즐겁고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시시콜콜하게 알려주신 것이 수련입니다. 기쁘기 위해 하는 것이 수련이라는 얘기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수련을 ‘불행해지는 방법’ 쯤으로 잘못 알아들으신 것 같더군요. 오만상 을 찌푸리고 죽을상을 하면서 수련을 합니다. 온갖 타령을 하고 엄살을 부립니다. 그렇게 행복하지 못할 바에는 그만두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기쁨이라는 것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사명을 알고 행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제 경우 인생의 반 이상을 그것 때문에 헤매고 다녔습니다. 왜 태어났는가? 무엇을 하러 태어났는가? 그걸 알기 위해 헤매고 다녔습니다.

다행히 저는 복이 많아서 저의 사명을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히 알아냈습니다. 제가 자신 을 과대평가해서 스스로에게 이것저것을 강요했다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대개 사이비 종교 교주들이 자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할 것처럼 얘기하잖아요? “내가 알파요, 오메 가요!” 이렇게 얘기하지요. 그렇다고 과소평가하는 것도 못 봐줄 일이고요. 자기 사명을 정확히 아는 게 가장 좋은 것입니다.

저는 알려드리는 사람입니다. 우주는 어떤 곳인지, 선인은 어떤 분인지, 조물주님은 어떤 분인지, 어떻게 창조를 했는지......, 이런 것을 알려드렸습니다. 또 수련을 통해서 선인이 되는 방법, 조물주가 되는 방법을 알려드렸습니다. 이미 90%를 알려드렸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개별적인 적성이나 능력에 따라 하는 일은 다를 수 있지만 큰 줄거리는 같습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바로 ‘행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에서는 달란트라고 하지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어 그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찾아내고, 갈고 닦아 빛내고, 옆 사람과 나누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살아지는 인생 VS. 사는 인생』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