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표는 진화

03 완성을 향해 가는 길

* 수선재의 명상 선생님인 문화영님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하신 말씀을 기록한 글입니다.

하느님의 다양한 모습

예전에 이런 우화를 들은 적 있습니다.

하느님께 그 모습을 한 번만 보여 달라고 매일 기도드린 사내가 있었습니다. 모습을 보여주셔야만 더 잘 믿을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은 “오늘 네게 내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기쁜 사내는 정성 들여 준비를 끝내고 하루 종일 기다렸으나, 하느님은 좀처럼 나타나 주지 않으셨습니다.

눈 빠지게 하느님을 기다리는 동안 한 명의 거지가 동냥을 구걸했으나 쫓아 보냈고, 한 명의 소녀가 성냥을 팔아달라고 문을 두드렸으나 거절했고, 한 명의 술주정뱅이가 집 앞 벤치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누워 있기에 오늘 귀한 손님이 오시니까 제발 꺼져달라면서 호통을 쳐 쫓아버린 일이 있었지요.

밤이 되어도 나타나 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원망하며 사내는 울부짖었습니다. 왜 제게 거짓말을 하셨느냐고요. 하느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아들아! 왜 나를 원망하느냐? 나는 오늘 네게 세 번이나 임했으나 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박정하게 쫓아내었다. 나는 몹시 슬프구나.”

조물주님에 대해 설명할 때면 저는 이 이야기를 많이 인용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그 표현이 참 좋기 때문입니다. 조물주님은 그냥 나타나고 싶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얘기지요. 반드시 귀하고 그럴듯한 모습만 조물주님이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저같이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이 앞에 앉아계신 나이 어린 회원님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조물주님의 씨앗을 부여받은 인간

조물주님은 하늘이기도 하고, 벌레이기도 하고, 땅이기도 하고, 흙이기도 합니다. 조물주님은 우주 만물에 들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조물주님의 분신인 ‘본성(本性)’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가능성의 씨를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조물주의 반열에 오를 수도, 미물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도 있는 아주 신축성 있는 씨입니다. 그 씨가 제대로 발아하면 조물주가 될 수 있습니다. 영양분이니 햇볕이니 하는 조건이 좋으면 조물주의 자질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지요. 어쩌다 보면 꽃도 못 피우고 쭉정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요.

그렇게 부여받은 씨앗을 ‘신성(神性)’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귀한 보물을 주려고 하셨답니다. 원래는 그냥 주려고 하셨는데, 보니까 인간들이 너무 말썽을 일으키고 괘씸하더래요. 그래서 그 보물을 어딘가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 놓으셨는데 바로 인간의 마음속이었답니다. 인간들이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이건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간만 찾아라, 하고 그 귀한 보물을 마음속에 숨겨놓으셨답니다.

그 보물이 곧 신성입니다. 어떤 대단한 신도, 조물주님조차도 인간의 마음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것은 각자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신성 때문입니다. 조물주님이 인간을 마음대로 하시지 못합니다. 부모가 자기 아이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다 의사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조차도 자기 의사가 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기를 바랄 수는 있지만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기 마음에 있는 신성이 밝혀져야만 조물주의 뜻을 따릅니다. 신성을 밝히기 전에는 조물주님이 와도, 신들이 수백 명 와도 안 됩니다. 신성이 변화되어 스스로 알아서 하기 전에는 삼천포로 빠지는 인간을 어쩌지 못합니다. 바라볼 뿐이지요. 저 또한 “이렇게 신성을 밝혀라” 하고 방법을 알려드릴 뿐입니다.


신성과 동물의 속성이 반반

인간은 반반입니다. 반은 신이고 반은 동물입니다. 몸은 동물의 속성을, 마음은 신의 신성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마음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니까 동물과 같은 속성의 몸을 만든 것입니다.

조물주님과 같이 될 수 있는, 완벽해질 수 있는 자질을 부여하면서 그 내용 자체는 완벽하지 않은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의도적으로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반반으로 창조했습니다. 우주의 스케줄은 모든 것을 반반으로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원래 불완전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조물주가 만든 것 중 가장 완벽한 것은 바로 조물주 자신이며,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얼마나 부족한가의 차이가 있을 뿐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지구 인류보다 많이 앞선 우주인들도 진화를 거듭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 원래 완벽하게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원래는 완전하게 태어났는데 중간에 타락을 해서 불완전하게 되었다고 가르치는 종교도 있더군요. 인간이 죄를 저질러 불완전하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 잘못을 대신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러한 가르침이 참 이상했습니다. 왜 부모가 지은 죄를 대신 갚아야 하는가? 만일 아버지가 도둑질을 했다면 아버지 잘못인데 왜 자식들이 대신 갚아야 하는가? 참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련을 통해 깨닫고 보니까 인간이 공통적으로 받아야 하는 불행은 조상이 잘못해서 그 죄를 뒤집어쓴 게 아니더군요. 인간은 원래 불완전하게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왜 인간을 불완전하게 창조했을까?

그럼 조물주님은 왜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었을까요? 왜 인간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서 고통, 슬픔, 비애를 겪게 하는 것일까요? 조물주님은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으며 어디까지 관여한 것일까요?

조물주(造物主)라고 하면 ‘만들 조造’ 자를 써서 ‘물건을 만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물건을 만들 때는 항상 목적을 염두에 둡니다. 내가 물건을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물건을 어떤 목적으로 어떤 수준에서 만들 것인지 생각하지 않습니까?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를 예로 들면 두 가지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능력이 부족해서 잘 그리고 싶어도 어느 정도로밖에 못 그리는 경우입니다. 둘째, 대상에 따라 초등학생 대상의 그림은 초등학생 수준에서, 박사 대상의 그림은 박사 수준에서 그리는 경우입니다. 능력 있는 화가라면 붓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조물주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능력이 없어서 인간을 이 정도로 불완전하게 만들었을까요? 아니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불완전하게 만들었을까요? 의도가 있었다면 어떤 의도였을까요? 어떤 의도로 인간을 이 정도 수준에서 창조 했을까요?


만일 완벽한 인간만 있다면?

만일 인간이 완전하게 창조되었다면, 태어나는 아기들이 다 완전하다면 이 우주는 어떠할까요? 완전한 상태로 수억 년, 수십억 년 유지된다면 어떠할까요? 그 세계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다 조물주님 같은 분만 사는 세상이라면 너무 재미없지 않을까요?

우리가 살면서 ‘저 사람보다는 내가 조금 더 나으니까’ 하는 것 때문에 조금 기쁘고 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기쁘고 상대적으로 슬프고, 그러잖습니까? 다 완벽하고, 다 미남미녀이고, 다 부자이고, 다 화가이고, 다 작가이고, 다 예술가이고……, 이렇게 완벽한 세계가 펼쳐져 있다면 살고 싶은 욕구, 발전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까요?


각각 다른 수준에서 창조됐다

조물주님은 어떤 수준에서 인간을 만들었는가? 완벽한 수준에서 만들었는가? 동물 수준에서 만들었는가? 곤충 수준에서 만들었는가? 조물주를 도와서 뭘 하려고 하면 어느 정도의 수준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지능을 지닌 영장류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차등(差等)을 두고 만들었습니다. 어떤 인간은 처음부터 동물 수준으로, 어떤 인간은 처음부터 신의 수준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어떤 인간은 아이큐를 굉장히 높게 부여해서 만들었습니다. 천차만별로 만든 것입니다.

처음부터 진화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부여받은 인간이 있고, 바닥부터 시작하여 아주 오랜 기간을 묵혀 지내야 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다 진화를 하는데 출발점이 다른 것입니다.

만든 인간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조물주님조차 모릅니다. 예측은 할 수 있어도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수준의 인간도 만들어보고 저런 수준의 인간도 만들어보고 해서 여러 종의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완전해지는지, 어떻게 조물주의 반열에 오르는지 보면서 계속 프로그램을 개선합니다.

‘이 부분은 좀 고쳐야겠구나’ ‘이 부분은 너무 많이 들어갔으니까 좀 빼야겠구나’하면서 계속 보완합니다. 한 번 만들고 나면 끝나는 게 아니라 실험을 거듭하면서 계속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출발점이 다 같다면?

그렇다면 왜 인간을 서로 다른 수준으로 만들었을까요? 인간이 다 조물주님의 작품이라면 왜 처음부터 다 같은 수준으로 만들지 않고 차등을 두어 만들었을까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골고루 섞여 있지 않고 모든 사람이 일률적으로 출발점이 같다면 그것 또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출발점이 달라야 재미도 있고 살아가는 보람도 있습니다.

한참 뒤에서 출발했지만 더 멀리 가는 재미도 있고, 바로 진화할 수 있는 지점에서 시작했지만 시행착오를 거쳐서 한없이 돌고 돌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곳이 인간 세상입니다.

그리고 우주에는 인간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 이외에도 수만 종의 다른 종이 있으며 종마다 존재 이유와 역할이 다릅니다. 그렇게 다양성을 구비한 것은 조물주님의 창조 테크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놓으면 정체되고 발전하지 못합니다. 서로 다르고 차등이 있을 때라야 부딪히고 충돌하여 없어지거나, 정반합(正反合)해서 다른 물질이 생기거나 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러면서 인간에게는 조물주님과 가장 가까운 자질인 신성을 부여했습니다. 조물주님이 될 수 있는 씨앗, 기적이고 영적인 조건이 갖추어지면 발아할 수 있는 씨앗을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게 줬습니다.


비워진 부분으로 인한 혜택

인간이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은 채우지 못한 공백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공백 부분이 있다는 것은 가장 값진 혜택일 수 있습니다.

전부 채워져 있다면 그 안에 무엇을 더 채워 넣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비워져 있기에 그곳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채워 넣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래 존재하던 부분까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점이 있음으로써 오히려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든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어려서부터 있어 온 열등감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인간의 모습으로 있을 때는 전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극복하는 방법은 자신이 인간이며 불완전한 존재이고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정하고 나면 극복 방법이 생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두 완성을 향하여……

며칠 전 어느 분이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며 열어 보니, 본인의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이 주위 분들에게 폐가 된다면 명상을 하러 오지 않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간 이분에게는 “세상에는 들어야 할 소리가 그리 많지 않으며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명상에서는 차라리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이 낫다, 그리고 육체의 장애는 마음의 장애에 비하면 축복이다, 명상을 할 수 있는 몸과 영성을 갖춰주심에 감사하라”는 내용의 말씀을 여러 차례 드리며 격려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이분이 건망증 환자가 되어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물으면 “제 귀가 잘 안 들리나요?” 하고, 그러면 옆에 있던 다른 분은 “님의 귀가 잘 안 들리시나요? 그 사실을 잊어버려서 미안합니다” 이렇게 되도록.

이 세상에 기억해야 할 것이 얼마나 있을까요? 자신의 외모가 불구이거나 어디가 아픈 것, 대학을 안 나온 것, 지위와 돈이 없는 것……, 특히 타인의 잘못은 자나깨나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 건망증 환자가 되어 누가 물으면 “제가 대학을 안 나왔나요? 제가 가난한가요? 제가 박사인가요? 누가 잘못했나요?” 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늘의 사랑, 땅의 고마움, 타인의 잘못에 앞서 내 마음의 불구.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우리는 모두 완성을 향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 ― 그것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지요?

『살아지는 인생 VS. 사는 인생』(수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