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는 나의 선생님

01 서로에게 자유를 주라

* 수선재의 명상 선생님인 문화영님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하신 말씀을 기록한 글입니다.

어떻게 부부로 만나지는가?

얼마 전에 어느 회원님의 전생을 보니까 중국 북경 지역에서 상당한 고관으로 사셨더군요. 우리나라의 관직에 비교한다면 도의 국장 정도 관직으로서, 중앙 정부는 아니었으나 지방 정부의 상당한 고관이셨습니다.

이분이 현재의 아내와 결혼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분은 말을 타고 가고 아내는 걸어가면서 서로 보고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마음을 움직인것이 금생에 인연이 되었습니다. 조그마한 계기인데 이번 생에 부부로 만나게 된 것이지요. 다른 회원님들을 살펴봐도 마찬가지더군요. 얽히고설킨 부채관계가 많아서 만나진 분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작은 계기로 부부가 되었더군요.

얽히고설킨 관계도 없는데 어떻게 부부로 만나게 됐는가? 뭔가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만나진 것입니다. 상대방을 통해 나에게 필요한 어떤 공부를 하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 임시로 만나진 관계가 부부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좋은 일로만 배우지는 않습니다. 나쁜 일을 통해서도 배우고 좋은 일을 통해서도 배우는데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으면 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는 가벼운 인연

부부 사이는 가벼운 인연입니다. 올 때도 다른 데서 왔고, 갈 때도 다른 데로 갑니다. 부부라 해서 절대 같은 곳으로 가는 게 아닌 것이지요. 함께 명상을 해서 같은 경지에 오르지 않으면 헤어질 때 각기 다른 곳으로 갑니다.

부부 사이는 또한 순간적입니다. 아무리 길어야 70~80년을 같이 사는 사이입니다. 부모자식 간의 인연보다 덜 긴밀합니다. 혈연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부부 사이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옷이라는 게 입다가 벗으면 내 것이 아니잖습니까? 부부들이 이혼하고 나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잘만 사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부모자식 사이는 혈연이기 때문에 수족과 같습니다. 다리가 하나 잘린다면 편치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옷을 벗으면 어떤 때는 날아갈 것 같습니다. 그 옷이 갑옷이었다면 벗고 나면 너무나 홀가분하겠지요. 솜털 옷이었다면 입었을 때 포근할 것이고요.


결혼은 원래 없는 것

결혼이라는 제도는 왜 생겼는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 놓은것입니다.

“결혼은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더군요. 결혼을 해야만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니까, 국가의 입장에서는 결혼을 많이 하는 게 좋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국민들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다 결혼해서 애를 많이 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이런 걸 위해서 누군가가 만들어낸 제도라는 얘기지요.

결혼이라는 것이 좋은 점도 있지만, 사실 엄청난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결혼은 했지만 경제적인 부담은 각자 진다거나, 아이는 낳지 않는다거나, 혼인신고는 안 한다거나, 섹스는 안 한다거나, 섹스를 의무사항이 아닌 선택사항으로 둔다거나……, 이런 움직임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을 서양에서는 다 '웰빙(well-being)'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나라는 굉장히 보수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학교를 나오면 결혼해야 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고, 아이를 낳으면 길러서 대학을 보내야 하고……. 이런 것들이 완전히 사회화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는 슈퍼맨, 슈퍼우먼을 지향하는 문화 속에서 자랐기에 남자의 경우 새벽부터 밤까지 직장에서 혹사당하는 것을 모범적이라고 생각하고, 여자도 가사와 직장을 완벽하게 해내는 걸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에 와서야 웰빙 하겠다, 회사에서 죽도록 일 안 하겠다, 가정에 너무 매여 있지 않겠다,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기존 세력들은 그런 사람들을 곱게 보지 않지요. 하지만 우주의 입장에서는 원래 결혼이라는 제도가 없습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진화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하고, 아니면 안 하는 것이지요. 아이를 낳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여 있지 않습니다.


내 것이라는 착각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다 보면 사회화가 됩니다. 길들여지는 것인데 사실 이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너무 잘해주는 부부가 있습니다.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될 정도로 다 알아서 해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받는 쪽은 자립능력을 잃어버립니다. 혼자서 살아갈 능력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운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길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시장에 가면 뭘 어떻게 사야하는지……. 길들여지니까 혼자 살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럼 상대방에게 그렇게 잘해주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가?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길들이는 것입니다. 잘해주는 사람을 보면 항상 반대급부가 있습니다. “내가 해준 만큼 나에게 뭘 해달라” 이렇게 요구하는 게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것이지요.

부모자식 사이도 마찬가지여서 자식한테 공들이는 부모일수록 간섭하고 바라는게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너는 의당 어떻게 해야 한다” 하는데 거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런 식으로 부부간에 서로가 남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매일 확인하는 게 그거잖습니까? “자기, 누구 꺼야?” 하고 물으면 “네 꺼” 하고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부부도 자녀도 다 내 것이 아니고 남입니다. 내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남이 해줘야 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개 보면 가벼운 인연인 데 비해 서로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더군요. 스쳐 지나가다가 만난 사이인데 무슨 대단한 권한이나 있는 것처럼 많은 걸 요구합니다.


의식의 독립, 경제적인 독립

자꾸 의식을 독립시켜야 하는데 우선 경제적으로 독립시켜야 합니다. 미국에만 가도 반찬값은 누가 내고, 밥값은 누가 내고, 집값은 누가 내고……, 이렇게 서로 분담합니다. 비행기 타고 12시간만 가면 그런 사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아직도 원시적으로 누가 누구에게 의존해 있고, 또 그걸 정당하게 요구하나요? 인식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남편이 월급봉투째 아내에게 갖다 맡기고, 손 비비면서 용돈 타 쓰는 부당한 문화가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물론 가사노동이 가치가 있습니다. 일정 범위 내에서 경제적인 기여도를 인정해줘야 합니다. 하지만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선을 그어야지 부당하게 끌려가면 안 됩니다. 지금부터라도 그런 걸 자꾸 얘기해서 독립을 시키십시오.

제가 예전에 한국여성개발원에서 있을 때 보니까 여성해방의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와 정情문제, 딱 두 가지더군요. 여성해방은 여성들이 경제력을 갖추고, 정에 관한 부분을 혼자 해결할 줄 알면 자연히 풀릴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 같이 일하던 직원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이혼을 하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변호사를 소개해 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둘 다 원해서 이혼을 하는데 왜 변호사가 필요합니까? 가서 협의 이혼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위자료를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면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대답하더군요. “위자료를 왜 받으려 하십니까?” 물으니까 결혼 당시 혼수를 3천만 원가량 해갔는데 적어도 그것은 다 받아내야겠답니다. 그래야 자신이 살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제가 “왜 위자료를 받을 생각을 하십니까? 차라리 당신이 남자에게 주십시오” 하니까 “위자료는 당연히 여자가 받아야 하는 것이지, 어떻게 여자가 남자에게 줄 수 있어요?” 하고 반문하더군요. 기존의 고정관념으로 보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지요.

위자료란 이혼의 원인을 제공한 측이 상대방에게 “미안하다”는 뜻으로 주는 것이잖습니까? 그런데 왜 여자는 응당 피해자이고 남자는 가해자라고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그 두 사람은 서로 맞지 않아서 헤어진 건데요. 그런 생각부터 고쳐야 합니다.

명상은 여성해방을 넘어 인간해방을 하자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속하는 여러 가지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것이 명상인데, 정과 돈에 관련한 부분을 누군가에게 의존한 채로 자유로워지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명상을 해봤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서적인 부분, 경제적인 부분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며, 신체적으로도 독립해야 합니다.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 된다

부부란 자신의 생활을 하면서 나눌 수 있는 부분만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공동으로 육아하고, 공동으로 경제활동하고, 공동으로 취미활동하면서, 그 나머지 나눌 수 있는 부분만 나누면 됩니다.

그런데 ‘1+1=2’ 이렇게 만들어서, 그 ‘2’를 또 반으로 나누려고 하더군요. 둘을 합쳐서 짬뽕을 만든 다음에 나누려고 하는 건데, 그러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대개 보면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이래야 하고, 아내는 이래야 하고 남편은 이래야 한다는, 벽처럼 형성된 의식이 있습니다. 부모님들 살아오신 것을 보면서 고정된 어떤 상像이 생겼는데 그걸 깨지를 못합니다.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데, 어떤 기준을 세워놓고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이상하다고 합니다.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내가 아니잖느냐?”이래야 합니다. 머리로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냥 인정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걸 못하시더군요. ‘저 사람은 저렇게 다르다’라고 인정하면 되는데 부부라는 이유로 같기를 바라더군요. 여기 계신 분 중에도 같은 분이 어디 있나요? 다 다릅니다. 얼마나 다른 두 사람이 만났는데 어떻게 같기를 바라나요? 다른 게 당연하고 오히려 더 좋은 것입니다.

문화란 형성되는 데 수백 년이 걸리는 것이어서, 문화 차이가 나는 것은 하루아침에 해소할 수 없습니다. 부부간에도 문화 차이가 나면 하루아침에 해소할 수 없습니다. 수십 년, 수백 년 차이가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것은 알고 보면 문화의 차이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지요.


기대가 없으면 행복할 수 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큽니다. 항상 기대하지 않는 마음, 빈 마음으로 매사를 대해야 합니다.

예전에 같이 명상하던 분 중에 부부 사이가 너무나 좋은 남자 분이 계셨습니다. 둘이 그렇게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고, 남편이 아내를 쳐다보는 눈길이 아주 다정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이가 좋을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부인이 외모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지요. 남편은 참 매끈하고 잘생겼는데, 부인은 퉁퉁한 외모에 남편보다 훨씬 늙어보였습니다.

나중에 그분이 말씀을 하시더군요. 결혼을 늦게 했는데, 생활에 지쳐서 결혼이라도 해서 편안해지고 싶은 마음에 아는 사람의 소개로 선을 보러 나갔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여자가 안 와서 둘러보니까 웬 엄마 같은 사람이 앉아있더라는 겁니다. ‘설마 저 여자는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바로 그 여자였더랍니다. 여자가 그때도 그렇게 퉁퉁하게 생겼었나 봅니다. 그런데 그분은 여자가 수더분하게 생겨서 결혼했다고 하더군요.

아내에게 기대하는 것은 오로지 애들 잘 길러주고 밥 먹게 해주는 것이랍니다. 그 이상은 기대를 안 한답니다. 그러니까 늘 아내가 새롭더라는 겁니다. 기대가 전혀 없으니까 뜻하지 않은 일을 하면, 예를 들어 생일날 손님을 초대하겠다고 하면, 그저 놀랍고 기쁜 것입니다. 기대가 없으니까 사이가 좋은 것입니다.

만약에 여자는 이래야 하고, 이왕이면 저래야 하고, 이런 기대를 한다면 현실이 기대에 못 미치니까 늘 속상할 겁니다. 매일 못마땅하고 짜증이 날 겁니다. 그분이 그렇지 않은 비결은 바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아내가 있어 주니 좋고, 밥 먹게 해주니까 사먹지 않게 돼서 좋고, 또 자식 낳아 주니까 너무 고맙고……. 매사가 이런 식이었습니다.

부인이 직장도 안 다니고 살림만 하면 다른 사람 같으면 “집에서 하루 종일 뭐 하느냐?”고 야단을 칠 텐데, 그분은 오로지 “아이 셋 기르느라 얼마나 바쁘겠느냐?”고 하더군요. 행복의 비결은 바로 그런 기대하지 않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배우자를 그냥 “하나의 인간이다”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 순간 바라는 바가 없어집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빈 마음으로 대하면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과 계속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은 왜 그러는가 하면 그 사람들을 못마땅해 하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있기 때문에 거기 못 미치는 주변 사람들을 못마땅해 하는 것이지요. ‘나는 왜 이럴까?’ ‘저 사람은 왜 저럴까?’ 따지게 되고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기대가 전혀 없으면 상대가 하나라도 해주면 아주 놀랍고, 반갑고, 새롭습니다. 기대를 잔뜩 하면 아무리 잘해줘도 계속 못마땅한 것이고요. 무심(無心)은 명상뿐 아니라 매사에 다 필요한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무심으로 있으면 모든 것이 감사로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