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사랑으로 가는 길

01 선악과를 보지 않는다는 것

* 수선재의 명상 선생님인 문화영님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하신 말씀을 기록한 글입니다.

연극배우 윤석화가 가지지 못한 것

윤석화라는 연극배우를 아시나요? 미모에 노래 실력까지 갖춘 뛰어난 배우인데, 나왔다 하면 사람들이 줄을 선다더군요. 연극계가 불황일 때도 “윤석화가 출연했다” 하면 공연장이 미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흥행배우이다 보니 방송국이나 영화사에서도 출연 요청이 많이 들어오는데, 그분은 연극 이외에는 안 한답니다. 아무리 흥행배우라 해도 연극판에서 받을 수 있는 출연료는 많아야 천만 원인데, 그 천만 원을 받고 몇 억씩 주는 영화나 드라마는 안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고 또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이더군요.

이분이 뒤늦게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체외수정을 하는 등 무진 애를 써도 안 되었다고 하더군요. 9년 동안 노력했는데도 끝내 아이가 안 생겨서 결국에는 입양을 했다고 합니다. 다 주셨는데 아이를 안 주신 것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금생에 어떤 면을 크게 비워서 나옵니다. 비워진 면이 무엇이냐는 사람마다 다 다른데, 이분의 경우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재능이니 미모니 여러가지를 다 갖췄는데, 단 한 가지 아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선악과 공부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따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과가 있습니다.

너는 금생에 돈이 없다, 너는 금생에 건강이 없다, 너는 금생에 사랑이 없다, 짝이 없다, 아이가 없다, 부모가 없다……. 이런 것들을 한두 가지씩은 다 가지고 내려옵니다. 지상에 내려올 때 “너는 이것은 따먹지 마라” 하는 선악과를 가지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게 한 가지인 사람은 아주 성적이 좋은 것이고, 전생에 살아온 결과에 따라 두 가지, 세 가지……, 이렇게 많을 수도 있습니다.

선악과 공부란 “나는 금생에 뭐가 없다”라는 것을 알면 거기에 대해서는 깨끗이 포기하고 물꼬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쪽으로 터집니다. 금지된 선악과를 굳이 따먹으려고 하지 말고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면 그쪽으로 트이는것이지요.

예를 들어 ‘성(性)’이라는 것은 도(道)와 맞바꿀 정도로 강렬한 것입니다. 『소설 선仙』에서도 사랑이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된다고 했잖습니까? 알고 보면 그게 함정이어서 그걸 금해 봐야 그 에너지가 다른 쪽으로 쓰입니다. 우리가 수련을 하면서 ‘금촉’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꼭 수련이 아니더라도 역사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분들을 보면, 특히 예술가들을 보면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많이 불행합니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것이지요.

“너는 금생에 지상에 가서 불행하게 살아라” 이런 뜻이 아닙니다. “그 불행한 것을 다른 쪽으로 돌려서 다른 능력을 개발해라, 인간의 존엄성, 위대함, 창조력을 드러내라,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인간다움을 보여줘라” 이런 뜻입니다. 그 뜻을 잘 알아들으면 어느 한 부분에서 일가를 이룹니다.

그런데 못 알아듣고 ‘나는 왜 이게 없을까? 왜 저게 없을까?’ 하고 자꾸 불행한 쪽을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개발이 안 됩니다. 계속 다른 쪽만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은 몇 십 배로 크게 확대되어 보이는 반면, 자신에게 있는 것은 당연하거나 시원찮게 생각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의 떡이 항상 커 보이는 것입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바로 그런 얘기입니다. 그냥 주면 되는데, 주면서 “열어보지 마라” 하니까 괜히 열어보고 싶은 겁니다. 온갖 에너지를 거기 다 쓰게 되고, 밥 먹을 때도 ‘저 상자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 합니다.

하느님이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이건 따먹지 마라”는 말씀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계셨다면 선악과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만 있었겠습니까? ‘동산’이니까 생명나무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나무가 다 있었겠지요. 그런데 따먹지 말라고 하니까 너무나 궁금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선악과를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나온다는 것, 자신에게 금지된 것을 보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 열려 있는 것을 찾아서 열심히 개발하라는 것,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사실 선악과만 주신 것은 아닙니다. 생명나무도 같이 주셨습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같이 있는데, 선악과는 독과 약을 같이 주니까 따먹지 말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라는 것입니다.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굳이 왜 따먹겠습니까? 보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빨리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지구는 공부하는 게 목적인 별이기에

선악과 공부 중에서도 참 힘든 것이 사랑과 성(性)에 관한 공부입니다. 왜 그렇게 힘든가 하면 굉장히 혼돈스럽기 때문입니다. 지구 전체적으로 너무나 많은 기준이 난무하기 때문에 혼돈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만 봐도 유교 사회라서 성을 자꾸 감추는데 러브호텔은 세계에서 가장 많잖습니까? 성에 대해 쉬쉬하는데 텔레비전을 틀면 온갖 게 다 나오고요. 그러니 사람들이 어떤 걸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 모릅니다.

독일 같은 나라는 유럽에서도 가장 개방된 성문화가 있습니다. 독일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의 경험담인데 어느 독일부부가 자기를 초대해서 잘 대접해주더랍니다. 그러더니 그 남편이 “섹스는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물어 보더랍니다. “혼자 왔으니 문제다”고 대답하니까 “내가 병에 걸려서 의사가 일 년간 섹스를 금지시켰다, 그러니 나대신 부인을 상대해 달라”고 부탁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유학생이 부인을 상대했는데 그동안 남편은 바깥에서 휘파람을 불면서 열심히 목공예품을 만들더랍니다. 다 끝내고 나오면 수고했다고 등을 두드려 주고요.

그런가 하면 아랍권에서는 여자들이 차도르를 쓰고 다니고 외간 남자와 눈도 안마주칩니다. 만일 외도라도 하다가 잡히면 사형을 당합니다. 옛날에는 돌로 쳐죽이기도 했다지요. ‘너무 억울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시대에 그 장소에서 태어난 여자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그런 극기의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필요한 공부에 따라 아랍이면 아랍, 한국이면 한국, 이렇게 적합한 나라를 찾아 태어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억울해 하지 말고 한 번 겪어 봐라”는 뜻이 있습니다. 경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거기서 얻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돌로 쳐 죽이거나 손목을 자르는 등 무자비한 계율이 있는 것은, 지구가 미개해서라기보다는 지구에 온 사람들이 그런 공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안해보는 공부, 극기하는 공부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주홍 글씨』를 보면 주인공 여자와 목사가 율법에 매여서 금지된 사랑 때문에 고통 받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사랑을 안 해보는 공부를 해봐라” 하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을 구속하는 제도가 없는 별도 많습니다. 영성이 진화된 별들입니다. 아주 진화된 별에서는 일부일처제도 없고 결혼이라는 제도도 없습니다. 남녀가 서로 좋게 잘 지내다가 어느 한 쪽에게 더 좋은 상대가 생기면 아주 기뻐하면서 그쪽으로 보내줍니다.

반면 지구에서는 “너는 내 꺼, 나는 네 꺼” 하면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소유권 이전을 절대 안 해주고, 내 것인데 남이 함부로 가져가면 칼부림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진짜 주인의 허락도 없이 소유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지요.

그럼 지구는 왜 이런가 하면 “학교”이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가서 한 번 고통을 받아봐라”라는 뜻이 있는 별입니다. 누리는 게 목적인 별이 아닙니다. 공부 과정에서 누리면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 학교 다니면서 할 것 다 하면 공부가 되지 않지요. 지구라는 별 자체가 공부하는 학교이기 때문에, 하라는 것보다는 하지 말라는 게 더 많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극도로 단련하고 극기해보는 것이 상당히 재미가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괴롭다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안 해보는 재미가 또 있는 것이지요. 수련이란 그렇게 자신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간적이고 동물적인 한계를 뚫고, 그걸 통해 의지, 인내, 고통, 기쁨 등 여러 가지를 맛보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통해서만 기쁨을 맛보지는 않습니다. 극도의 고통 속에도 기쁨은 있습니다.


인생의 성공을 어디에 두는가?

때부터 정(情)이라고는 모르고 자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유복자라서 아버지를 뵌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하고 불러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또 굉장히 선이 굵은 분이셨는데, 일찍이 신앙생활을 택하셔서 그쪽으로 에너지를 많이 쓰셨습니다. 언니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우선시하는 분들이셨고요.

정을 모르고 자랐으면 정이 없어야 하는데, 또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발휘해보지 못해서 몰랐는데, 알고 보니 정이 너무 많았던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연애는 못해봤습니다. 누가 좀 좋아지려고 하면 단점이 눈에 띄더군요. 한 3번 정도 만나면 결판이 나니까 어떻게 가보지를 못했습니다. 눈에 차는 사람이 없었던 셈이지요. 그러다 보니 늘 사막과 같은 갈증, 허기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수련을 했는데 결국은 그 정이 저를 끝까지 붙들어 매더군요.

정이라고 해서 반드시 남녀 간의 사랑을 뜻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꼭 남녀관계가 아니라도 누군가와 깊이 교류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이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는데, 깊이 이해하고 소통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누군가를 못 만났습니다. 한 사람도 못 만났습니다.

그런 외로움 속에서 끝까지 갔는데 차라리 그게 나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제 자신을 많이 위로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불행한 스케줄인데 결국은 그게 축복이더군요. 그런 스케줄이 아니었다면 내가 수련을 했겠는가? 사는게 재밌으면 수련을 했겠는가? 안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미모는 아니어도 어딘가 일그러지지는 않은 정상적인 외모에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을 할 만한 건강을 주셨습니다. 게다가 재능을 주셨습니다. 수련을 잘하는 것도 재능이라고 볼 수 있잖습니까? 또 이뤄내는 집념을 주셨지요.

이런 것들과 가정적인 행복은 막상막하의 비중이라고 볼 수 있는데, 보통 사람에게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아마 가정 쪽을 택할 겁니다. 바보라도 좋다, 재능은 없어도 좋다, 이러면서요. 사람들은 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잖습니까?

그런데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가정에 달려 있지는 않습니다. 가정에 성공했다고해서 성공한 인생이고, 실패했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은 아닌 것입니다. 가정적인 행복은 부분일 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제 상황이 오히려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수련을 할 만큼의 지능지수를 가지고 태어났고, 또 수련생들을 끌고 갈 수 있는 에너지나 지도력 등을 두루 받아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사실 저는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루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임에 갔더니 어느 분이 제게 “대단히 성공했다”고 표현하시더군요. 그런데 진짜로 대단히 성공했습니다. 남이 알아주니까 성공했다는 게 아니라 하늘이 알아주니까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없다’고 생각하면 행복해진다

제가 대학생일 때 어느 봉쇄 수녀원에 가본 일이 있었습니다. 가족면회를 1년에 한 번밖에 허락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서 대화해야 했습니다. 그곳에 계시는 수녀님들은 전혀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더군요. 그 안에서 자급자족하고 기도하면서 사시더군요.

제가 그때 그분들의 모습이 너무나 평안하신 것에 놀랐습니다. 굉장히 충만한 생활을 하고 계시더군요. 서약을 하고 자신의 몸을 바친 분들인데, 몸을 바친다는 것은 곧 마음을 바친다는 얘기지요. 마음은 보이지 않으니까 몸을 바친 것입니다. “몸을 바쳐 헌신한다”는 말 속에는 내 몸과 마음을 함부로 굴리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김동리의 『등신불』이라는 소설을 보면 자기 몸을 태워 공양을 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몸을 내놓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최고의 보시입니다. ‘살아생전에는 도(道)를 구할 수 없어서 하늘 앞에 몸이라도 내놓겠다’ 하는 마음입니다.

그 등신불이 실제로 중국에 있는데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습니다. 예전에 화상을 입은 분을 뵌 적이 있는데 조그마한 화상에도 통증은 참 엄청나더군요. 그러니 자신의 온몸을 천천히 아래서부터 태우는 건 얼마나 고통이 심했겠습니까?

몸을 귀하게 여기면 마음이 귀해지고, 몸을 중요하게 여기면 마음이 중요해집니다. 그러기에 몸을 귀하고 깨끗하게 간수하는 것은 굉장히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성을 선악과로 상징하여 금기시하는 것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어쩌다 보니까 못해봤다’라는 입장인 분도 계십니다. 예를 들어 40대 노총각, 노처녀인데, 상황이 안 되고 기회가 안 돼서 못해봤다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못한 것과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몸을 바친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있는데 형편이 안 돼서 못 누린다’고 생각하면 끝없이 괴로워집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불행해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나는 처음부터 없다’고 생각하면 쉬워집니다. ‘없다’고 생각하면 그다음에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뜻밖에 주어지는 것들은 선물로 느껴집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금하기보다는 스스로 먼저 금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사랑의 상처를 달래는 법』(수선재)